유구 그리고 오키나와
유구 그리고 오키나와
  • 박중현 겸임교수 (철학과)
  • 승인 2020.11.17 18:32
  • 호수 12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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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시내를 가로지르고 있는 미군 기지.
오키나와 시내를 가로지르고 있는 미군 기지.

 일본 최고의 관광지는 오키나와이다. 대부분의 청소년은 수학여행으로 한 번 정도 다녀오는 곳이다. 이런 풍광과 달리 오키나와의 근현대사는 오욕과 아픔으로 점철되어 있다. 오키나와의 풍습을 우리에게 잘 알려준 이는 홍어장수 문순득이었다. 1801년(순조 1년) 전라도 우이도의 홍어장수 문순득은 흑산도에서 홍어를 사서 돌아오다 풍랑을 만나 표류를 하게 되었다. 제주도 옆을 지나면서도 해류를 거스르지 못해 결국 도착한 곳은 오늘 날 오키나와 섬인 유구였다.

 유구국은 명이 바다를 막는 해금 정책으로 동아시아 해상 무역의 중심지였다. 유구는 명의 조공국이었기 때문에 다른 나라의 상선이 유구를 통한 중계무역을 하였던 것이다. 이후 일본과도 조공 관계를 맺어 양속 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명보다는 일본 사츠마번이 사실 주인 노릇을 하고 있었다. 

 문순득 일행이 유구의 오시마라는 섬에 도착하자 섬에서 대여섯 명이 와서 물과 죽을 주었다. 통역도 함께 와서 이들에게 여러 사실을 물었다. 그들은 처음 도착한 양관촌에서 48일간을 머물다가 우겐촌을 거쳐 유구의 수도인 나하로 갔다. 조선으로 가려면 나하에서 배를 타야 했기 때문이다. 유구는 조선과 국교가 있었기에 조선으로 갈 수 있는 배를 탈 수 있었다. 사신이 가는 길에 상인들도 함께 가는 조공무역 행렬에 따라가야 하기 때문에 문순득이 6개월을 기다렸다. 이들은 중국으로 가는 사신들의 조공 행렬에 붙어 별도의 호송선을 타고 중국의 푸젠성 푸저우를 향해 나아갔다.

 오키나와의 근현대사는 굴욕이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대외 팽창을 추구하는데 첫 번째가 유구였다. 1871년 풍랑을 만나 타이완에 도착한 유구인을 타이완인들이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 정부는 유구의 외교권을 외무성으로 이관시키고 1874년 타이완 출병을 단행하여 일본군대를 타이완에 상륙시켰다. 그리고는 손해배상을 요구하였다. 청 정부는 무력 대결보다 타협을 택해 손해배상금을 지불하기로 하고 합의하였다. 이는 결국 일본의 유구 지배를 인정한 것이었다. 나아가 1879년에는 아예 유구를 합병하여 오키나와현으로 만들어 일본에 편입시켰다.

 아시아 태평양 전쟁 당시 서태평양에서 패전을 거듭하던 일본군은 오키나와까지 밀리게 되었다. 일본 정부는 본토 결전을 위해 오키나와에서 옥쇄를 명령하였다. 미군은 1,500여 척의 함정과 18만의 군대를 앞세워 오키나와를 공격하였다. 당시 오키나와를 지키던 일본군은 11만에 불과하였다. 1945년 3월부터 6월까지 벌어진 전투에서 오키나와 민간인의 1/4 정도인 10만여 명이 사망하였다.

 전투 와중에 죽은 민간인 사망자도 있었지만 많은 이들은 집단 자결을 강요당하여 죽었다. 군인들은 미군이 상륙하면 무참한 학살이나 강간 등이 있을 것이라며 최후까지 싸우고 마지막엔 자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에 속아 아버지가 가족을 죽이고 자신도 죽는 현장도 있었다. 미군이 점령한 후 오키나와는 1972년까지 군정이 실시되었다. 오키나와 여러 지역은 미군기지가 존재하고 사람들은 미군기지 사이로 난 길을 통해 생활을 하고 있다.

  동아시아 최대의 미군기지가 있는 오키나와는 한국과도 관련이 있다. 바로 오키나와 전쟁에 참가한 24군단 사령관 하지가 한국 발령을 받은 곳이 오키나와였다. 또한 베트남 전쟁의 배후기지였다. 베트남 미군의 모든 군수 물자는 오키나와를 통해 이송되었다. 오키나와는 이러한 전쟁의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평화의 슬로건을 내걸고 있다. 미군 기지 철수 등을 주장하는 행동들은 자민당 에 맞선 후보를 현지사로 당선시켰다. 환경 보호를 위해 미군 기지 설치를 반대하는 운동을 오랫동안 전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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