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재의 앞에서 오스틴(J. L. Austin)의 화행의 개념을 소개한 적이 있다. 말이 사물이나 사상을 가리키는 직접적인 지시나, 은유와 같은 이차적인 지시의 차원과는 다르게, 말하는 행위 자체가 발휘하는 힘에 대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이른바 4차 산업혁명의 핵심적인 내용이 무엇이고 이것이 각종 산업 및 교육에 미치는 영향을 정확히 모르는 인물이라도 그 중요성을 설파할 수는 있다. 사람들이 그것의 지시내용이 정확히 무엇인지 따지지 않을수록 그 인물의 화행은 성공적이어서 중요한 일을 맡을 수도 있다.

  화행의 효과도 은유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언어가 지시 대상과 자의적으로 연결되는 기호, 즉 상징이기 때문에 가능하기는 하다. 그런데 바르뜨(R. Barthes)가 비판하는 자본가의 은유만 하더라도, 전언(message)에는 지시되는 내용이 있으며 자본가의 의도도 전언 안에 있다. 그러나 화행의 층위에서는, 전언에 발화자 스스로가 지시되는 내용이 정확히 무엇인지 몰라도, 지시적 의도가 없이 화행적 의도만으로도 효과를 본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지시나 은유보다 화행이 강요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종종 ‘자기 설정 과제’를 학생들에게 제시하기도 한다. 자기 설정 과제란, 문법 영역의 강의를 예로 들면, 교과 내용과 관련된 문법 현상 중에 학생 스스로 발견한 흥미로운 것에 대하여, 교재의 문법해설과 다르거나 없는 설명을 제시해 보는 것이다. 어떤 학생이든 모국어는 항상 사용하는 언어이기 때문에 주제가 될 만한 언어 현상은 얼마든지 있다. 예를 들어, ‘-어 있다’와 같은 문법형식은 “기차가 역에 도착해 있다.”와 같은 문장에는 적용될 수 있는데, “?그 사람이 물고기를 잡아 있다.”와 같은 문장에는 적용될 수 없다. 그 문법성 판단은 교과학습에 의한 것이 아니라 모국어 화자의 직관에 의한 것이므로, 주제 설정이 꼭 공부를 잘해야 가능한 것은 아니다.

  이런 종류의 과제는 학생의 자발적인 생각을 유도하여 초보적이나마 지식을 창출하는 것이 핵심적인 목표이다. 그런데 학생들이 과제를 풀어가는 과정은 필자가 의도한 바와 다른 경우가 많다. 학생들은 우선 강의계획서나 교재의 내용을 훑어보고 주차별, 단원별 제목으로 등장한 문법 용어 중에 하나를 고른 다음, 그 주제와 상관되는 논문이나 서적 등의 자료를 검색한다. 그리고 해당 자료들을 요약 정리하여 제출하는 것으로 과제를 완성하고자 한다. 가끔은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는 필자의 성화에 못 이겨서, 찾아낸 논문의 주장에 동조한다는 정도의 글귀를 적어 넣기도 한다. 오늘날처럼 책상에 앉아서 검색어만 몇 번 두드려 넣으면 바로 정보가 제공되는 시대에 이러한 요약정리가 새로운 정보가 되기는 어렵다.

  이런 문제는 자기의 생각을 말하고 싶은 끝에 글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과제를 위해 글을 ‘지어’ 내려는 데에 있다. 이런 경우의 과제보고서는 처음에 의도한 대로 스스로가 창안한 정보를 전달하려는 지시적 목적보다는, 과제를 위해서 얼마나 공부했는지를 알리려는 화행적 의도로 작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필자의 교수법이 실패한 경우이다. 굳이 정보화 시대임을 강조하지 않더라도, 대학 교육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지식, 정보를 창출하여 남에게 제공할 수 있는 인력을 길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무엇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성적 또는 성과로 기록될 것인지가 중요하게 되었다. 이른바 ‘스펙 쌓기’다. 10여 년 전, 수시 입학 제도를 마련할 때만 하더라도 수학능력검사[수능시험]로만 입학지원자를 판단하지 않고 다양한 수학(修學)의 재능을 가진 사람들에게 고르게 기회를 제공하자는 취지였다. 그러나 결과는 학생들이 교과 외의 자유로운 탐구를 해야 할 시간을 오히려 학생부의 기록을 남기기 위한 노력의 시간으로 보내게 된 것이다.

  지시보다 화행이 중시되는 ‘스펙’은 교실 밖에서 더 심각하다. 우리 학교만 하더라도, 11월과 12월 중에 전 교직원이 온라인으로 수행하도록 의무화된 교육 과목이 5개이며 과목마다 5회 정도의 동영상이 내용을 채우고 있다. 대면 교육으로 환산하면 전 교직원이 대략 3박 4일을 합숙하며 교육을 받아야 하는 시간이다. 그럼에도 대단히 많은 구성원이 그 교육들을 ‘성실히’ 이수한다. ‘이수했다’는 것이 강좌에서 담고 있는 내용을 다 파악했다는 것인지, 아니면 기록 효과를 위한 ‘청행(聽行)’인지는 분간이 가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매번 일백 퍼센트 학생 상담 완료와 같은 수행 지표가 실제의 내용을 지시하고 있는지, 그저 화행의 결과일 뿐인지 구분할 수 없을 때가 많다.

  이런 종류의 화행은 지시내용, 즉 실질적인 정보를 창출할 시간을 갉아먹는다. “당신이 실제로 무엇에 대해 말하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그저 당신이 우리가 정해 놓은 종류의 말을 했다고만 알려다오.” 지시보다 화행이 강조되는 사회는, 자본주의의 은유보다도 더 위험하다. 정보화 시대에는 생산수단(자본)으로서의 지식과 정보를 창출할 수 없는 인구가 다수일 것으로 예측되는데, 화행은 그러한 계층에게 급료를 제공하기 위한 기준으로 강요되고, 그렇게 길들인 다수를 잉여로 취급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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