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 모란공원묘지로
가자. 모란공원묘지로
  • 박중현 겸임교수 (사학과)
  • 승인 2020.11.24 10:23
  • 호수 126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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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 공원의 박래전 열사 묘. 왼쪽 뒤로 전태일 열사 묘가 보이고, 그 뒤로 이소선 여사의 묘도 보인다.
모란 공원의 박래전 열사 묘. 왼쪽 뒤로 전태일 열사 묘가 보이고, 그 뒤로 이소선 여사의 묘도 보인다.

  모란공원묘지는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에 있는 공원묘지이다. 11월 14일 한 모임과 함께 모란공원묘지를 답사했다. 경천 가도의 마석역 근처에 있으니 춘천으로 놀러 가는 길에도 잠시 들러볼 만하다. 아침의 서울은 뿌연 미세 먼지와 함께였으나 그곳에 도착하니 화창한 가을날이 나를 반겼다. 모란공원묘지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설 공원묘지이다. 이와 반대로 망우리공동묘지는 일제가 건설한 공설 묘지이다. 일제는 1912년 <묘지·화장·화장장에 관한 취체 규칙>을 제정해 개인 묘지를 인정하지 않고 공동묘지를 사용하도록 하였다. 묘지에도 일제의 흔적이 남아있는 이유이다.

  모란공원묘지를 찾은 이유는 그 전날인 11월 13일이 전태일 열사 50주기가 되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한국의 경제 성장은 정부가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등을 지속적으로 전개한 이유도 있지만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산업의 제일선에서 묵묵히 희생을 감내한 노동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요즘 모 당의 한 국회의원이 “주 52시간 확대 시행 연기가 전태일 정신”이라는 희한한 주장을 했다가 당 안팎에서 몰매를 맞고 있다.

  전태일은 1970년 11월 13일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 준수하라!”를 외치며 분신하였다. 전태일의 분신은 한국 사회에 큰 파장을 남겼다. 독재에 대한 저항만을 민주주의로 생각했던 당시 사회에서 노동자의 삶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민주화 운동도 민중에 기반을 둬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하였다. 전태일이 마석 모란공원묘지에 묻히며 이후 이곳은 민주주의와 노동 운동을 하다 세상을 떠난 이들의 안식처가 되었다. 박종철도 김용균도.

  한국보다 앞서 고도 압축 성장을 이룩한 일본 역시 노동자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이 시기 대도시의 공장과 상점은 많은 일손을 필요로 하였다. 농사를 이어받은 장남을 빼고 둘째, 셋째는 일자리를 찾아 대도시로 떠났다. 매년 3월 대도시에 취업이 결정된 중학교 졸업생들은 ‘집단취업 열차’를 타고 도쿄, 오사카 등 대도시로 이동하였다. 이 열차는 상공회의소와 고용주들이 대절한 것이었다. 이들은 오랫동안 이익을 내는 귀중한 것이라는 의미를 담아 ‘금달걀’이라고 불렸다. 이런 값싸고 우수한 노동력을 농촌에서 대량으로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 일본 성장의 밑거름이었다.

  유신 체제가 무너지는데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것이 YH무역 사건이었다. 가발공장이었던 YH무역은 업주의 방만한 경영으로 어려움을 겪자 폐업 신고를 해버렸다. 내팽개쳐진 노동자들은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하게 되었다. 당시 신민당 총재는 김영삼이었다. 그러나 경찰의 진압 작전으로 농성은 해제되었다. 김영삼은 이에 항의를 하다 국회의원직에서 제명되었다. 마산과 부산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진압 과정에서 김재규와 차지철의 대립으로 결국 박정희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이가 김경숙이었다. 경찰의 진압 작전 중 그녀는 목숨을 잃었다. 당시 22세. 그의 무덤도 모란공원에 있다. 약력에는 “1958년 광주에서 출생, 1971년 광주남초등학교 졸업, 1971년 무허가 장갑공장 입사, 1976년 YH무역 입사...” 그녀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공장 노동자가 되었던 것이다.

  중국은 인구의 과도한 도시 유입을 막기 위해 도시에 사는 사람과 농촌에 사는 사람을 구별해 놓았다. 그러나 도농 간 소득 격차 때문에 농민들은 불법적으로 도시의 공장 등에서 노동을 하고 있다. 이들의 처지는 불법 노동자와 같은 입장이므로 제대로 된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다. 무려 3억 명에 이른다고 한다. 동아시아의 경제 성장은 이처럼 힘없는 노동자의 피와 땀을 기억하지 않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전태일 묘소를 참배하러 가는 길에 낯익은 이름을 발견했다. 바로 전태일 묘 앞에 박래전의 묘가 있었다. 박래전은 이미 숭대시보 1246호에서 말한 바가 있다. 87년 6월 항쟁의 뜻을 제대로 실천할 것을 주장하며 학생회관에서 분신하였다. 그는 “내 무덤을 만들기보다 그대들 내 말을 새겨들을 것”을 당부하였다. 우리는 과연 그들의 말을 실천하고 있는지 모란 공원묘지를 들러 되새겨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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