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6일. 총성이 울리다
10월 26일. 총성이 울리다
  • 박중현 겸임교수 (사학과)
  • 승인 2020.12.01 10:15
  • 호수 126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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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지폐 1,000엔 권에 새겨진 이토 히로부미 초상.
                                         일본 지폐 1,000엔 권에 새겨진 이토 히로부미 초상.

  1909년 10월 26일.

  총성이 울렸다. 하얼빈역 광장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쓰러졌다.

  70년 후인 1979년 10월 26일.

  총성이 울렸다. 서울 중앙정보부의 안가에서 박정희가 쓰러졌다.

  대부분 한국인들은 이토가 을사조약을 강요하고, 초대 통감을 지내며 한국 침략에 앞장섰다가 안중근 의사에게 사살당한 정도만을 알고 있다. 그는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법제 마련, 헌법 제정 등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가 20년이 넘는 동안 일본의 1,000엔 짜리 지폐에 사용된 것은 그에 대한 일본 사회의 평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이토는 메이지 유신의 주역이 되었던 죠슈번(오늘날 야마구치 현)의 하급 무사 출신이었다. 이토는 요시다 쇼인이 세운 쇼카손주쿠(松下村塾)에 들어갔다. 요시다 쇼인은 하급 무사 출신이었으나 서양의 문물을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학당을 열었다. 이토는 그곳에서 존왕 사상과 서양 문물의 우수함을 함께 배웠다. 그렇지만 그는 양이(攘夷:서양 배척)를 숭배하였다. 이런 신조에 따라 영국 공사관을 불태우기도 하였고, 천황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던 인물을 사살하기도 하는 등 강경파 수구 세력이었다.

  그랬던 그가 당시 죠슈번이 영국에 파견한 5명의 영국 유학생에 포함되었다. 위와 같은 사건들로 명성을 얻은 것도 유학생 선발에 영향을 끼쳤다. 이토는 서양을 이기기 위해 유학을 하였으나 영국의 문물에 충격을 받고 ‘양이’를 버리게 되었다. 귀국 후 그는 막부 타도 운동에 앞장섰다. 일본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세력은 존왕양이를 내세웠다. 그들은 ‘천황을 존중하며 서양 세력을 배척’하자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서양과 타협하는 막부 타도를 외쳤다. 그랬던 그들이 메이지 유신 후 서양과 관계를 개선하고 서구식 개혁을 택한 것은 쉽게 이해하기 힘들다. 조선의 위정척사파들이 갑신정변을 주도한 격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를 대표적으로 보여준 인물이 이토 히로부미다. 무사 중 가장 낮은 신분이었던 그가 정권을 잡기 위해서는 기존의 신분제와 제도를 부정해야 했고, 그 명 분을 서구의 강대함에서 찾았다. 그러한 강대함을 이루어 냄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유지·강화할 수 있었다. 일본 제국의 강대함은 결국 대외 침략으로 확대되었다. 유구가, 타이완이, 조선이 그리고 중국과 아시아 대부분이 일본의 침략으로 고통받았다.

  조선과 이토가 만나는 시점은 1875년 운요호 사건이다. 일본 내정을 둘러싼 내부 갈등에 이를 이용하기 위해 보고서를 조작함으로써 조선 침략과 강화도 조약으로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러일 전쟁이 끝나고 이토는 을사조약을 강요하는 임무를 맡았고 바로 초대 통감이 되어 한국 식민지화를 위한 준비를 진행시켰다. 1907년 고종은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하여 을사조약은 강요에 의한 것으로 ‘무효’임을 주장하도록 하였다. 이토는 이에 책임을 물어 고종을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켰다.

  1909년 통감 직을 사임하고 한국 땅을 떠난 이토는 같은 해 10월 북만주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에 의해 생을 마감하였다. 안중근은 옥중에서 <동양평화론>을 통해 한·중·일 3국이 대등한 관계 위에서 평화적 공존을 위해 노력할 것을 주장하였다. 안중근 의사의 이토 사살은 결국 동양 평화를 저해한 자에 대한 응징이었던 셈이다. 안중근은 남만주의 여순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이토가 죽은 후 만주에는 만주사변을 거쳐 일본의 꼭두각시 정권인 만주국이 수립되었다. 소학교 교사였던 박정희는 천황에 대한 충성 맹세를 계기로 만주국 군관 학교에 입학하였다. 졸업 우수자에 주는 특전으로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만주의 관동군 장교가 되었다. 해방 후에는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5.16 군사 쿠데타를 거쳐 대통령이 되었다. 박정희가 추구했던 삶의 목표는 무엇이 었을까? 대한민국의 부강이었을까 아니면 그를 내세운 종신 집권일까? 그 체제에 저항한 부산과 마산의 시위를 강경 진압하려던 그는 부하의 총을 맞고 숨을 거두었다. 그는 우리 숭실대에서 직선거리 1Km도 안 되는 곳에 묻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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