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부문 당선작

10번 핀 잡기

김소희(영화예술·15)

13년 전 여름, 나와 수경 선생님은 볼링을 쳤다. 미국에서는 우주왕복선이 폭발하고, 우리나라에선 16대 대통령이 출범하는 해였다. 묵직한 검은색 볼링공 하나로 두 사람이 번갈아 치느라 손가락을 끼우는 구멍은 따뜻해져 있었다. 선생님은 나보다 머리 하나가 작고 팔다리가 가냘팠지만, 볼링공을 손에 쥐고는 절대 흔들림이 없었다. 공을 굴리면 교실의 나무 바닥에서 우르르르르 소리가 길고 일정하게 이어졌다. 그 소리는 천둥처럼 사람을 긴장시키고 몸 어딘가를 뜨거워지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오른쪽 손등이나 왼쪽 젖꼭지, 목 뒷덜미나 엉치뼈 부근, 코끝 같은 곳들. 볼링을 치기 전까지는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각이었다.

누군가 나에게 좋아하는 운동이 있냐고 물어온다면 나는 없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곤 수경 선생님에 관한 얘기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

 

내가 자란 언덕진 B동 한가운데에 큰 교회가 있는 것은 이상했다. 지붕의 십자가나 입구의 예수상을 보지 못했다면 고등학교 건물이라고 오해했을 만큼 컸다. 비탈진 B동에 어울리는 건 겨울이면 깡깡 얼어버리는 얼음을 깨부수는 것이나 고양이들도 무서워하는 커다란 쥐들이었다. 골목길 어귀에 앉아 담배를 피우던 동네 할머니들은 교회가 재개발을 염두에 두고 있다 추측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진갈색 벽돌의 육 층짜리 교회는 그곳에 있었다.

여름이었다. 열여섯의 나는 천장 위로 쥐들이 뛰어다니는 쪽방 한가운데에서 알전구를 켜 보고 있었다. 태엽처럼 돌아가는 스위치를 아무리 만져봐도 불은 들어오지 않았다. 그날따라 어둠 속에서 밤을 기다리는 것이 무서웠다.

집에는 혼자만 있는 날이 많았기에 내 대화 상대는 주로 양진이었다. 생리대가 없어서 휴지를 둘둘 말아 받치고 다니면 같은 반 양진이 귀띔 해 주었다. 옆 동네 주민 센터 화장실에 가면 생리대를 공짜로 가져갈 수 있다고. 양진은 주민 센터까지 함께 가 주었다. 양진과 나 모두 생리대를 넉넉하게 챙기곤 오랫동안 손을 씻었다. 나는 대형 할인점에 들어가자고 말했다. 각자 카트를 한 대씩 끌고 시식 코너에 하나하나 방문했다. 방학이 시작하고 양진을 만나지 못했다. 양진은 자신이 교회에서 운영하는 JJC에 다닌 얘기를 해 준 적이 있다. 또래 중에는 이미 초등학교 때부터 다니다가 더는 가지 않는 친구들도 있었다. 체격이 크고 살갗이 까만 양진은 천사처럼 키가 크고 늘씬한 사람이 되라는 가르침이 싫었다고 했다. 그날 밤 내가 그곳에 간 것은 예배가 끝나면 저녁을 얻어먹을 수 있다는 양진의 말 때문이었다.

 

여름방학 전부터 교회 입구에는 커다란 현수막이 걸렸다. 교회 일층 JJC에서 진행하는 여름 문화 학교에 대한 공고였다. 그 당시에 JJC가 무엇의 약자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글씨체만 봐도 YMCA의 짝퉁 정도로 인식할 수 있었다. 물놀이, 책 읽기, 미술, 통기타 등등의 수업을 신청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수업에 참여하면 새로 생긴 달란트 화폐라는 것을 회당 2달란트를 부여 해 준다는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었다. 난 열 가지가 넘는 과목의 이름들을 찬찬히 읽다가 볼링을 배우고 싶다고 생각했다. 볼링은 평생 가도 해 볼 기회가 없을 것 같은 직감 때문이었다. 양진과 했던 수많은 약속은 사라졌다. 방학이 되면 기차를 타고 멀리 떠나본다든가 볼링이나 당구를 치러 가 보자고 했던 약속들. 중학교 아이들은 궁색함을 죄로 여겼다. 양진은 브랜드 이름이 있는 겉옷을 빌려주는 친구들과 놀았다. 스치듯 양진을 볼 때면 서로 겨드랑이털을 뽑아주거나 친구의 흉을 보던 때가 그리웠다.

사층의 교회 사무실에서는 종이 한 장을 주며 빈칸을 채우게 했다. 어머니. X. 아버지. 멀리 지방에 나가서 일한다는 내용을 적었다. 사무실 직원은 머리를 몇 번 쓰다듬으며 천사들이 너를 보살필 것이라 말했다. 1달란트면 이층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할 수 있다고 했다. 일단은 화요일에 첫 수업을 받으러 가야 했다.

 

수업 첫날, 뙤약볕을 가로지르며 JJC에 도착했다. 구석에서는 바람을 넣은 고무풀에서 어린아이들이 물장구를 치고 있었다. 그들을 지나쳐 JJC의 반 층 지하로 내려갔다.

반 지층에는 세 개의 교실이 나란했다. 불을 켜지 않아도 강렬한 햇살이 들어와 대기 중의 먼지를 비췄다. 교실의 앞뒤 미닫이문마다 풀을 둥글게 엮은 것이 바싹 마른 채 걸려있었다. 복도 가장 끝의 교실에 들어가자 한 여자가 있었다. 안쪽 창문을 모두 활짝 열어놓은 채였다.

볼링?

그녀가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서른이 채 되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그녀는 교실의 책상을 뒤로 밀어붙이라고 말했다. 내가 책상을 밀면 그녀가 그 위로 책상을 쌓았다. 교실은 최대한으로 넓어졌다. 우리는 교실 가운데에 의자를 갖다 놓고 마주 앉았다. 선생님은 S동에 산다고 말했다. S동은 C시에서 가장 부촌이었다.

선생님이라고 불러. 수경 선생님.

큰 눈을 조용히 깜빡이던 그녀는 갈색으로 염색한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조그마한 입술 때문에 말소리도 작게 느껴졌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선생님을 따라 교탁으로 향했다. 선생님은 그 위에 올려두었던 스포츠백 안에서 낡은 볼링핀을 하나 꺼냈다. 스포츠백 옆으로 값이 나가는 과자 박스와 탄산음료가 있었다. 아버지와 식사를 할 때 식탐을 부리지 말라는 말을 들었던 것이 기억났다. 나는 침만 꼴깍 삼켰다. 핀은 페트로 된 음료들보다 훨씬 컸다. 바닥에 내려놓는다면 내 무릎 높이까지 올 것 같았다. 나에게 스포츠 백 안에 든 볼링공을 꺼내보라고 말했다. 새까만 바탕에, 반짝이는 가루를 퍼뜨려 놓은 조그마한 우주 같은 볼링공이었다.

수업은 화요일, 목요일 두 시부터 여섯 시. 방학이니까 늦지 않을 수 있지?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선생님은 공과 핀을 교탁에 올려둔 채 볼링의 간단한 규칙과 상식에 관해 설명했다. 볼링이 치러지는 레일의 길이는 보통 23m 정도이다. 폭은 약 1m. 레일 끝 열 개의 볼링핀을 더 많이 쓰러트리는 것이 게임의 최종 목표. 삼각형으로 정렬될 열 개의 핀을 칠판에 그렸다. 나는 볼링공과 핀을 손바닥으로 매만져보았다. 공은 의외로 쇠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주로 고무나 우레탄 등으로 만들어졌다고.

옛날에 독일에서 케글링이라는 게임을 했어. 악마를 상징하는 나무 조각을 수도원 끝에 세워놓고, 돌로 만든 공을 굴려서 쓰러뜨렸데. 잘 쓰러뜨릴수록 신앙심이 두꺼운 증거라고.

얼마 지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창밖에서 주광의 노을빛이 세차게 들어오고 있었다. 선생님은 교실 구석의 캐비닛에서 청소 도구를 모조리 꺼내버리고 볼링공과 핀을 넣었다. 교탁에 놓여있던 과자와 음료들은 파란 비닐봉지에 차곡차곡 집어넣고 나에게 건넸다.

혹시 가져가지 않을래? 나한텐 너무 많아서.

우리는 교회 초입의 아이들이 떠나간 고무풀 옆에서 헤어졌다. 나는 파란 봉투를 두 손으로 쥐고 인사를 하려 허리를 숙였다.

제일 힘든 게 뭐니?

나는 그녀를 보았다. 선생님은 몸을 숙여 고무풀에 손을 담그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오늘 배운 볼링에 관해 묻는 것인지, 내 생활에 관해 묻는 것인지 헷갈렸다.

불이요. 밝은 불 말고 뜨거운 불.

?

매일 꿈에서 따라와요.

.

바퀴벌레요. 여름이라 더 심해요.

그래? 선생님은 작게 말하곤 손을 털었다.

은행잎을 따다가 집안에 둬 봐.

 

 

목요일. 우리는 교실 바닥 틈을 지점토로 메우고, 종이테이프로 길게 레일을 표시했다. 하얀 테이프로 네모난 교실을 반으로 갈랐다. 그렇게 해도 교실 끝에서 끝은 23m가 될 수 없어 보였다. 공을 들고 나아가는 4 스텝과 5 스텝을 모두 배웠다. 나는 4 스텝을 걸었다. 우리가 가진 공은 9파운드로 4kg 가까이 되는 무거운 무게였다. 그것은 선생님의 마이볼이었다. 볼링장에서 쓰는 하우스 볼은 던지는 방향대로 곧게 나아가지만, 마이볼은 원하는 대로 곡선을 넣을 수 있었다. 잘 다루지 못하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곡선을 그리는 공이였다. 공에 맞춰 세미핑거팁으로 중지와 약지를 구멍에 끼웠다. 공을 굴리는 것 말고 예정된 위치에 내려놓는 것을 배웠다. 내가 내려놓아야 할 자리에는 스포츠 백을 활짝 열어두고, 주변으로는 수건을 깔아놓았다. 그렇게 자세만 연습했는데도 손가락이 파르르 떨렸다. 내가 걷기 시작하는 지점, 공을 던질 위치, 흔들리지 않게 왼팔을 뻗어 중심을 잡는 것. 선생님은 일관성이 중요하다고 말하며 내게 상체를 기울였다. 오른손은 근육이 뭉치고 손톱이 깨졌다.

릴리스 포인트에서 손을 앞으로 뻗어. 악수를 청하듯이.

선생님은 빠르게 스텝을 밟고 손을 앞으로 쭉 뻗어보았다. 손끝을 가볍게 편 모양새였다. 핀을 전부 쓰러뜨리는 것은 스트라이크. 우리는 스트라이크를 할 수 있는 아홉 개의 핀이 없었다. 선생님은 분필을 들고 나머지 아홉 개의 자리를 동그랗게 그렸다. 그러곤 하나뿐인 핀을 제일 오른쪽 구석진 자리에 세웠다. 번호로 따지자면 10번 자리였다.

저기가 마더 인 로 (Mother-in-law). 고수들도 저자리 때문에 스트라이크를 못 하는 경우가 많아.

선생님은 나에게 다가와 두 손으로 팔과 다리를 이리저리 주물러 보았다.

체형이 좋구나. 키도 엄청나게 크겠어.

나는 한걸음 물러났다.

우리는 저걸 꿈이라고 부르자.

선생님은 혼자 서 있는 볼링핀을 가리키며 말했다.

공을 굴려서 꿈을 잡는 거야.

꿈을 잡아요?

보통 잡는다고 해. 처리한다고도 하고.

나는 나쁜 꿈에서 깨어나던 아침을 떠올려 보았다.

공은 언제 굴려요?

선생님은 발을 두 번 굴렀다.

이런 데다 막 굴렸다간 공이 엉망이 될 걸?

그냥, 진짜 볼링장에 가서 치면 안 돼요?

권사님들께 말씀드려 놨어. 여기를 마루로 싹 바꿔 주실 거야. 핀도 아홉 개 더 사고.

언제요.

다 때가 있는 거야.

나는 시큰한 손목을 등 뒤로 숨기며 혼잣말을 했다.

시시해.

 

 

그렇게 한 주 동안 수업에 가지 않았다. 구석에 선풍기 한 대 틀어놓은 쪽방은 쉽게 시원해지지 않았고, 쥐들은 여전히 빠른 발 소리를 내며 돌아다녔다. 구색도 갖춰져 있지 않은 볼링 교실 따위 안 가면 그만. 창밖으로는 여자아이 여럿의 명랑한 웃음소리가 가까워졌다가 빠르게 멀어졌다. 바깥으로 나가 동네를 거닐었다. 내리막이 끝나는, 도로와 맞닿아 있는 곳에 싱싱하게 잎이 돋아난 푸른 은행나무들이 늘어서 있었다. 나는 손을 높이 뻗었다. 잎을 움켜쥐고 흔들어 보았지만 얇은 가지만 위아래로 흔들릴 뿐 떨어지지 않았다. 지나치던 누군가 나를 보면 나무와 악수 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입에서 탄식이 흘렀다. , 하고 뱉은 한 마디가 그날 하루 동안 처음 한 말임을 깨달았다.

꽃다발처럼 은행나무 잎을 모아 쥐고 다시 언덕을 올랐다. 기분 나쁜 땀이 흘렀다. 여느 때처럼 멀리서부터 어둠이 찾아오자 하얀 종이테이프로 만든 레일 앞에 서 있던 것이 떠올랐다. 몇 번 교실을 두리번거리다 하나에 공을 앞으로 내밀고, 둘에 다운스윙, 셋에 백스윙, 넷에 포워드 스윙 착지 후, 앞으로 공을 던지듯 내려놓던 것이. 내가 보지 못한 내 자세는 완벽했다.

금요일이었지만 선생님은 마치 수업 날인 것처럼 공을 쥐고 서 있었다. 교실 창밖의 순한 빛이 선생님의 왼편 얼굴을 비췄다. 우리는 별말 없이 수업했다. 일정한 위치에 공을 던지는 법에 관하여. 시선, 일관성, 어디에 공을 던질 것인지. 실전에서는 모두 잊고 핀만 바라보라고 했다. 희망하는 것을 생각해. 선생님은 공이 상해도 좋으니 굴려 보라고 말했다. 몇 번이고 굴렸지만, 레일의 허리에서 경로를 튼 공은 벽에 부딪혔다. 선생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라고 말했다. 두 손으로 공을 받치다 공을 몸 뒤로 보내고, 마지막 스텝을 디디며 손목을 꺾어 앞으로 내밀어서. 공인 떠난 내 손은 악수를 청하듯 허공에 남아있도록. 나는 핀을 쓰러뜨리고 선생님과 얼싸안았다. 온몸을 적신 땀이 서로의 몸에 닿았다. 나는 생에 가져서는 안 된다고 다짐했던 생각, 누군가 나를 지켜봐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입추가 다가온 것이 무색하게 더위는 끓어오를 듯 심해지고 있었다. 유달리 비가 오지 않는 여름이었다. 갑작스레 목요일 수업에 방문한 교회 박 권사는 바구니에 방울토마토를 담아 왔다. 박 권사는 선생님의 어깨를 연신 쓰다듬으며 높은 목소리로 반갑게 얘기를 나누었다. 나는 연습 때마다 상처가 늘어가는 볼링공을 안은 채였다.

추수의 때가 왔나요?

박 권사의 물음에 선생님은 고개를 저었다. 나와 함께 땀에 흠뻑 젖은 선생님은 박 권사를 한참이나 보았다. 박 권사는 나와 선생님의 손을 끌어 자리에 앉혔다. 맨바닥에 앉은 우리는 박 권사의 지시에 따라 손을 모으고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박 권사는 나와 선생님이 다치지 않고 무사히 연습을 마칠 수 있기를 기도하고, 오늘 한자리에 모이게 해 준 것에 감사하다며 마쳤다.

우리 교회에는 정해진 기도문이 없어. 대신 기도의 끝에는 반드시 타인을 위하는 내용을 덧붙여야 해. 기도를 의심해서도 안 돼. 의심은 죄야.

박 권사는 미소를 유지한 채 자연 성전에서 열리는 가을 행사에 관해서 얘기 해 주었다.

돌아오는 가을에 전국의 교회 사람들과 체육대회를 하는데, 참여하고 싶지 않니? 자연 성전은 뭐, 수련원 같은 거야.

나는 선생님을 돌아보았다. 선생님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럼요, 그래야죠 하며 중얼거렸다.

교회 사람들 다 가족이라고 생각하렴. 내가 딱 네 엄마뻘 아니니.

박 권사의 말에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다만 손을 문지르곤 방울토마토가 든 바구니를 쥐었다. 박 권사는 열심히 하라는 응원을 남기며 들어왔던 문으로 되돌아 나갔다.

, 체육대회 나가고 싶어? 우승하면 상금도 있어.

전 좋죠. .

기도하면 어떠니?

뭐가요?

난 내가 한 말들이 의심돼.

나는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바닥에 떨구려 고개를 숙였다. 선생님은 기도하듯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았다.

우리는 아멘, 하지 말고 이렇게 하자. 그렇게 될 거야.

 

집으로 돌아갈 때 주차장의 고무풀에는 아무도 없었다. 수업이 일찍 끝나 해는 여전히 높이 떠 있었다. 내가 사는 단칸방 철문 앞에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 우리 집에는 절대 들어오기 싫어했던, 양진이였다. 더운 날씨에도 긴 옷 주머니에 양손을 꽂고 있었다.

너 요즘 거기 다닌다고 들었어.

양진이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양진은 J에 관해 얘기해주었다.

 

체육대회는 시월 첫째 주 주말 동안이라고 했다. 우리는 개학을 맞이하기 전에 매일 만나기로 약속했다. 수업이 아닌 주말 예배 날, 선생님은 진짜 볼링장에 가 보자고 했다. 수업을 빠지고 놀러 나간 학생들처럼 키득거리며 큰길에 나섰다. 선생님은 나를 이끌고 속옷 가게에 갔다. 처음으로 몸에 맞는 속옷을 받았다. 볼링용품점 앞에 가서는 들어가지 못하고 쇼윈도에 바싹 붙었다.

장갑도 사고 보호대도 사면 좋을 텐데.

핀부터 사야죠. 하나밖에 없는데.

너는 하나도 제대로 못 맞추잖아.

선생님은 계속 길을 걸었다. 시내에 있는 크고 작은 볼링장들을 몇 개나 지나쳤지만, 어디에도 들어가지 않았다.

어디 아는 볼링장 있어요?

없어. 아무 데도.

무작정 버스에 올라탄 선생님은 자신의 집에 가자고 말했다.

우리는 S동까지 가면서 핀에 관한 얘기를 계속했다. 나는 핀이 하나이기 때문에 맞추기 어렵다는 견해를 고수했다. 여러 개면 서로 부딪히며 한꺼번에 쓰러뜨릴 수 있지 않으냐며. 선생님은 흔들리는 버스에 허리를 펴고 앉아 말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에 이르는 문은 넓고 커서 그쪽으로 향하는 사람이 많지만, 생명에 이르는 길은 좁고 험해서 사람이 적다.”

누가 그래요?

J.

내가 이맛살을 찌푸리자 선생님은 커다란 소리로 웃었다. 작은 어깨를 웅크리고 나를 올려 볼 때의 표정. 나에게 잘 해 주는 이유를 묻고 싶은 순간들이었다.

 

나는 거실 소파에 앉아 방에 들어간 선생님을 기다렸다. 창밖은 이미 깜깜했다. 아파트 안은 신혼집 같았다. 나는 실제로 신혼집에 가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손수 뜨개질 한 하얀 가구 덮게들, 유리를 세공해서 만든 작은 조각들이 그랬다. 소파 뒷벽에는 오랫동안 액자가 붙어있던 자국이 선명했다. 선생님은 안방에서 새하얀 볼링공을 들고 나왔다.

쥐어 봐.

나는 익숙하게 손가락을 끼우고 다른 손으로 받쳐 들었다. 공 위에는 새겨진 9파운드라는 금색 글씨. 우리가 쓰는 공보다 훨씬 무거운 공이였다.

배우던 것들은 계속 봐 주고 만져줘야 해.

허벅지에 볼링공을 얹고 떨어지지 않게 두 팔로 받쳤다.

힘이 더 세면 좋을 텐데.

아니야. 다른 운동은 힘이 세면 더 잘할 가능성이 큰데, 볼링은 그렇지 않대.

선생님은 내 옆에 앉아 그 사실이 흐뭇하다는 듯이 웃었다. 나는 샤워를 하러 들어갔다.

 

안방 침대에 나란히 누운 우리는 이불을 목까지 끌어당겼다. 선생님은 베란다 쪽을 향해 돌아누웠다.

하얀 볼링공, 한 번도 안 쓴 거야. 집에 가져가.

집에는 못 가져가요.

?

더러워져요.

선생님은 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선생님은 볼링 왜 치세요?

내가 물었다.

, 볼링만 계속 쳤어.

중학생이었던 선생님은 체육 교사의 눈에 띄어 준프로 선수로 길러졌다고 한다. 볼링 특기생으로 명문 고등학교에까지 진학했었다고.

그럼 왜 이제 안 해요?

하잖아, 너랑.

선생님은 그렇게 말하곤 짧게 웃었다.

그 선생님이 전도했어. 볼링장도 데려가고.

선생님은 자신을 책임지고자 볼링을 배웠다고 말했다. 술병이나 밥그릇으로 선생님을 때리던 아버지. 우리 교회가 믿는 교주 J의 교리를 접하고서야 아버지에 대한 마음을 외면하지 않고 곱씹게 되었다고 했다.

볼링 선생님이랑은 이제 안 만나요?

어디 갔는지 몰라.

양진이 J에 대해 알려준 것을 떠올렸다. J라는 오십 대 중반의 남자를 믿는 종교. 입을 다물었다. 돌이켜 보면 그때, 어떤 말보다 함구가 나은 순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새 학기가 시작하고, 나는 반에서 꽤 사교적인 사람으로 통하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이 말을 시작하면 눈을 끝까지 떼지 않고 들었다. 그렇게 많은 얘기를 들으면 피곤했다. 나는 그게 대화를 하는 것인지 누군가 던지는 감정을 다 받아주고 온 것인지 헷갈렸다.

선생님과 있을 때는 반대였다. 나는 선생님에게 모든 것을 얘기했다. 유쾌하지 않은 얘기들까지도. 같은 반의 싫어하는 친구, 가끔 아버지와 만나면 얼마나 어색한지, 먹으면 배가 아픈데도 냉면이 좋다는 얘기. 그렇게 가을이 왔다.

체육대회에 나가고 싶어서 안달이 난 사람은 우리뿐만이 아니었다. 예배에 가면 어른들끼리 모여서 무슨 종목으로 대회에 나갈지 떠들곤 했다. 아저씨들은 J님과 함께 축구를 뛰고 싶다고 했다. 어떤 사람은 게임에서 져도 좋으니 J님을 한 번만 만나보고만 와도 좋다고 얘기했다. 나는 연습이 끝난 후 기도를 올릴 때면 끝에 선생님에 대한 말을 붙였다. 내가 누구에게 기도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선생님이 펼쳐서 보여주기 시작한 교리 책 속의 남자, J라는 것만 알 수 있을 뿐이었다.

선생님은 볼링수업 시간 전후로 교리 책 공부를 시켰다. J를 믿는 자는 천국의 오색 침방이나 자연 성전 같은 이 땅 위의 예루살렘에 갈 수 있다는 이야기. 천사들은 모두 키가 크고 아름답다는 이야기. 어떤 이들은 꿈속에 키 큰 천사가 찾아와 J의 말을 대신 전해주었다는 이야기.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어머니에게 구박받던 J. 젊은 날에 월남전에 참전했다가 한국으로 귀국해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교리 책에 그려진 J의 모습은 젊고 명민해 보였지만 첨부된 사진 속 모습은 평범한 아저씨였다. 웃는 눈꼬리가 묘하게 휘어지는 아저씨.

J는 우리를 사랑해 주기 위해 왔어.

선생님은 주님이 우리와 더욱 가깝게 지내기 위해 J의 몸에 들어왔다고 말했다. 나와 시선이 마주치면 금세 웃어 보이는 얼굴. 전에 보이지 않던 송곳니나 뭉친 눈가 주름이 눈에 들어왔다.

 

돌을 던지거나 굴려서 표적에 맞추려는 인간의 본능. 기원전 이집트 유적에선 돌로 된 핀이 발견되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고대 볼링의 용구로 추측한다. 선생님은 모르는, 내가 책에서 우연히 본 볼링의 또 다른 기원이다. 나는 이집트보다 더 고대의 어떤 이가 커다랗고 둥근 돌을 굴리는 것을 그려보았다. 동물의 가죽만 몸에 두른 이는 이 시대에 없는 언어를 사용한다. 그의 곁에 다른 이들이 모여든다. 넓은 초원, 적이 없는 나라의 밤하늘 아래에서 최초의 볼링을 치는 것이다. 그들은 머리 위로 어떤 신도 두지 않는다. 그 순간 그들의 곁에 남아있는 것은 잘 타고 있는 모닥불과 표적을 쓰러뜨리려는 인간의 본능뿐이다. 나는 그 위로 선생님과 내 얼굴을 그려 넣었다. 우리는 모닥불의 일렁이는 빛을 받으며 마주 보고 웃었다. 전에 없이 순수한 웃음이다. 예수가 이 땅에 오기도 전의 일들이다.

선생님이 왜 그를 믿는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학교 시간에 맞춰 화요일과 목요일 저녁이면 볼링을 쳤다. 아멘 이라는 말을 지웠다. 여러 가지 생각을 억누르고 나를 안심시키듯이. 그렇게 될 거야. 그리고 교리를 배웠다.

 

비바람이 한바탕 휩쓸고 간 목요일 저녁이었다. 길바닥에는 젖은 낙엽들이 짓이겨져서 바닥에 달라붙었다. 내 낡은 운동화 앞코가 빗물에 축축이 젖은 채로 연습을 했다. 체육대회가 바로 두 주 앞에 다가와 있었다. 선생님은 계속해서 몸을 떨었다. 나는 선생님의 어깨에 내가 입고 있던 카디건을 둘러 주고 수업을 받았다. 오른손과 오른발을 먼저 움직여 네 번째 스텝에 공을 굴리는 것을 반복했다. 내가 핀을 쓰러뜨리는 횟수는 점점 낮아졌다. 집중이 되지 않아 공을 사선으로 굴리기 일쑤였다. 연습을 중단시킨 선생님은 입술 위에 검지를 댄 채 교실 안을 서성였다. 박 권사가 교실에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잘 안 돼?

박 권사는 친절한 말투로 나에게 말을 붙였다. 선생님은 앞문을 열어놓은 채 들어온 박 권사를 향해 허리 숙여 인사했다. 나는 재빨리 스텝을 밟아 공을 굴렸다. 공은 경로를 비틀고 앞문 방향으로 굴러가 버렸다. 선생님과 박 권사는 동시에 나를 바라봤다. 박 권사는 자신의 발치로 굴러온 공을 발로 밀어냈다.

마지막에 흔들리니까 자꾸 다른 길로 가잖아.

나는 굴러간 공을 주워 와 다시 스텝을 밟았다. 완전히 잘못된 투구에 공은 하얀 테이프 선을 넘어갔다. 나는 몇 번이고 굴러간 공을 주워 와 굴렸다. 선생님과 박 권사는 그 자리에 서서 말이 없었다. 언짢은 기분에 공을 세게 굴려버렸다. 여전히 핀을 맞추지 못하고 벽에 부딪혔다. 선생님은 핀의 뒤로 가서 섰다.

시선 정면.

공을 굴렸다. 핀을 비켜서 벽에 부딪혔다. 선생님은 공을 들어 나를 향해 굴렸다. 나는 다시 공을 굴렸다.

진짜 볼링장에 가면 홈이 있잖아. 거터. 너는 거기 계속 빠뜨리는 거야.

공은 하얀 테이프를 넘어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사람들이 거기를 뭐라고 부르는 줄 알아?

선생님은 가슴 앞으로 팔짱을 꼈다. 나는 허리를 펴고 섰다.

개구멍이야, 개구멍.

무표정 한 선생님은 나에게서 시선을 떼고 박 권사를 돌아봤다. 박 권사도 얼굴에서 미소를 지운 채였다.

네가 자꾸 길을 잘못 드니까 엄하게 구는 거 아니니.

 

 

박 권사가 자리를 뜨고 나서 한 시간을 더 연습했다. 교회에 있는 모두가 떠났는지 고요했다. 선생님은 나에게 카디건을 돌려주며 집에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혼자 갈 수 있어요.

빠른 길 알려줄까?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였다. 복도에서 의자를 하나 가져다가 창문 앞에 놓으라고 말했다. 내가 의자를 갖다 놓자 선생님은 그 위에 서서 창문을 열었다.

위험해요.

나는 의자 등받이를 꼭 잡았다. 선생님은 창틀을 부여잡고 훌쩍 뛰어서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지상에 올라간 선생님은 배를 털어내고 내게 손짓했다.

빨리.

나도 삐걱거리는 의자에 올라섰다. 선생님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선생님의 손을 잡고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교회에서부터 우리 집까지는 십 분도 걸리지 않았다. 나는 일부러 길을 돌아 집에서부터 멀어졌다. 선생님은 여전히 젖어있는, 가로등 불빛에 반짝거리는 길 위에 우뚝 멈춰섰다.

우리는 내기 하자.

선생님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선생님은 머릿속으로 볼링핀을 준비하라고 말했다. 그것은 돌을 채워 넣은 페트병이어도 좋고, 단단한 단풍나무로 만들어진 진짜 볼링핀이어도 좋다고. 교실에서 각양각색의 핀을 삼각형 모양으로 세워둔다. 우리가 가진 핀은 원래 그 구석 자리에 두고. 선생님은 공을 굴렸다. 스트라이크. 나도 공을 굴렸다. 스트라이크. 선생님은 신이 난 표정이었고, 아마 나도 같았을 것이다. 나는 80점만 넘겨도 좋겠다고 말했다. 선생님은 200점은 넘길 것이라며 우쭐하게 말했다. 오래 지나지 않아 웃음소리가 잦아들었다.

저 체육대회 안 나갈래요.

선생님은 내 앞에 마주 섰다.

?

, 신 안 믿어요.

원래 그래. 적응하는 거야.

나는 선생님을 내려보았다.

고집부리지 마세요.

선생님은 여전히 한기가 도는지 입술을 떨었다.

그렇게 구니까 아버지가 때리죠.

말을 뱉고 선생님의 눈을 피해 발끝을 바라보았다. 나와 마찬가지로 선생님의 신발도 앞코가 젖어있었다. 한참 뒤에 선생님의 얼굴을 봤을 때는 생각하는 눈으로 먼 곳을 보고 있었다. 마치 나와 한 자리에 있지 않은 것처럼.

나 운동은 좀 쉬려고.

저는…….

조금만 기다려 줄 수 있니?

나는 어깨를 바싹 오므렸다. 선생님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우린 괜찮을 거야.

 

 

나는 성인이 되자마자 B동을 떠나 서울에 정착했고, 선생님과 비슷한 나이가 되어간다. 몇 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는 B동에 가지 않는다. B동에 못 간다는 말이 정확하겠다. 내가 JJC에 나가지 않게 된 후 몇 년 뒤 B동의 재개발이 시작되었으니까.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왔고, 쥐가 나오지 않는 집으로 이사를 했다. 양진과는 같은 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다시 가까워지지 못했다. 가끔 B동을 지나치다 보면 봉긋 솟아오른 동네를 두른 하얀 바리케이트를 볼 수 있었다. 지금 B동엔 내가 알던 흔적은 모두 사라지고 깨끗한 아파트가 들어 서 있다. 그사이 나는 결혼할 뻔했으며, 가게를 차렸다가 동업자에게 폐를 끼쳤다. 누군가 내 곁에 있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것, 신이 필요한 순간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럴 때면 기도하듯 가슴 앞에 손을 모은다. 쓰러지지 않고 버텼다는 것을 자축하듯이. 그렇게 될 거야.

대학에 가기 직전의 겨울이었다. 나는 이미 허물어진 B동의 주변을 빙빙 거닐었다. 버스를 타고 S동으로 건너가서 다시 아파트 단지 안을 거닐었다. 가방을 쥐고 있는 손은 빨갛게 식어갔다. 선생님을 만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선생님과 닮은 뒷모습을 보면 흠칫 놀라 뒤따라 가는 것을 멈추기 위해서였다. 밤이 되자 단지 안에는 무서울 정도로 사람이 없었다. 나는 벤치에 앉아 멀리 심어진 상록수를 바라보았다.

볼링 교실을 쉬게 된 이후 선생님과 두어 번 B동에서 마주친 적이 있다. 한 번은 교회 입구에서, 한 번은 버스 정류장에서. 선생님은 정중하게 묵례하고 지나갔다. 마치 나한테 아는 것이라곤 이름밖에 없는 사람처럼.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전보다 더 수척해 미소를 짓기도 어려워 보였다. 몸이 좋지 않으시냐고 물었지만, 선생님은 말이 없었다.

어쩌면 희망하는 것이 생겼는지 물어봐야 하는데. 나는 추위에 오그라든 손을 바라보았다. 손가락을 뻗어 앞으로 내밀었다가 다시 쥐었다. 손은 공이 없어도 저절로 오므라지던 감각을 기억하는 듯했다.

오늘 아침, 사기 혐의로 복역했던 J가 출소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조간신문에 작게 난 기사였다.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서울에서 보낸 시간과 맞바꾼 작은 집안을. 바깥은 구름 한 점 없다. 여름이다. 내 곁에는 아버지도, 결혼할 뻔한 남자도, 십 년간 친구로 지내온 동업자도 없다. 우리가 준비했던 체육대회는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다고 한다. J와 신도들은 풀밭에서 축구를 했고, 볼링 경기도 무사히 열렸다. 수경 선생님은 그 자리에 없었을 것이다. 내가 아는 수경 선생님은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다. 나는 볼링을 치지 않는다. 볼링공을 쥐는 일조차 없다. 다만 누군가 악수를 청할 때면 그 손끝을 오랫동안 바라볼 뿐이다.

선생님이 나에게 선물했던, 선생님 집 소파에 두고 왔던 하얀 볼링공에 대해 떠올린다. 밤의 베란다 밖으로는 도시 불빛이 들어온다. 볼링공은 그 약한 불빛에도 반짝인다. 볼링공은 무게를 잊고 둥실, 베란다 밖으로 나간다. 바닥에 착지하면 우르르르르 굴러 C시를 가로지른다. JJC에 도착해 지하로 가는 계단을 탄다. 빈 교실 한 가운데 서 있는 볼링 핀 하나. 공이 핀을 툭 쓰러뜨린다. 검은 공과 하얀 공이 퉁 맞부딪힌다. 누군가 나에게 물어온다. 혹시 볼링을 좋아하냐고. 그러면 나는 가장 맞추기 어려운 핀을 꿈이라고 부르던 사람에 관해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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