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겨울은 유독 추웠다. 대학신문 기자였던 나는 숭실대학교 어느 교수님의 원고를 받으러 상도동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러나 날씨가 너무 추워 몇 정거장 못 가 근처 다방으로 피신하고 말았다. 얼마 후 다시 버스를 타 겨우 상도동 삼거리에 내렸다. 그때가 내가 숭실대학교와 처음 대면한 순간이 었다. 교수님은 원고를 내주시면서 내 전공을 물었고, “서군, 대성하시오”라며 덕담을 해주셨다.

  과연 대성할 팔자였던지, 나는 10년 좀 지나 숭실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교수 지원서를 낸 다음 학과 교수들에게 인사하느라고 연구관을 찾아갔는데 거기에서 희한한 경험을 했다. 어두컴컴한 복도 어디선가 작은 새 한 마리가 날아들더니 출구를 못 찾고 그만 벽에 부딪혀 쓰러지고 말았다. 나는 그 새를 조심스럽게 집어서 밖으로 내 보내주었다(믿거나 말거나, 다음 날 신촌의 어느 대학 건물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새들의 보은 덕분인지 나는 숭실대 교수가 되었다. 문제의 그 연구관 1층 입구에 내 첫 연구실이 있었다. 나는 숭실의 모든 것을 사랑했다. 해 질 무렵 학교 방송국에서 들려 주던 찬송가 선율이 특히 좋았다. 공부도 열심히 했다. 방학 때 텅 빈 교정에서 책과 씨름하며 진한 충일감을 느낄 수 있었다. 31년도 더 지나 나는 이제 학교를 떠난다.

  나는 숭실에 몸담고 있던 동안 목격했던 두 번의 눈물을 잊을 수 없다. 1993년 정치외교학과 창립 10주년 기념식을 주관하던 여학생이 촛불 세리머니 도중에 굵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2002년 숭실 동문 언론인 들이 단합대회를 연 적이 있다. 그때 동문들은 언론계에 이렇게 숭실 식구가 많이 있는 줄 몰랐다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때도 여러 동문이 가슴이 벅차 눈물짓는 것을 보았다.

  이 팬데믹 와중에 학교 문을 나서야 하는 졸업생들 중에서도 속으로 눈물을 훔치는 사람들이 있을 것 같다. 그들을 어떻게 위로 해줄까 며칠을 고민했다. 분명한 것은, ‘이 또한 지나가고 만다’는 사실이다. 인생은 생각 보다 길다. 오르막 내리막이 몇 번은 더 있을 거다. 너희에게는 젊음이 있잖아. 자신을 귀하게 여기며 꿋꿋하게 살아주길 바란다.

  연구실에 앉아 있는데 어느 순간 문을 박차고 들어오며 “교수님, 저 모르시겠어요” 하고 외치는 졸업생들이 가끔 있었다. 10년, 15년 지나 마침내 자기가 뜻하는 삶을 찾은 다음 자랑하기 위해 온 것이다. 어떤 친구는 지역에서 민중들을 돕는 일을 하고 있는데 내가 물었다. “야, 밥은 먹을 만하냐.” 그는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교수님, 걱정 마세요. 밥은 안 굶어요.” 오늘따라 그 아름다운 얼굴들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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