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어드와 한국선교<3>

 

한국 기독교문화 연구소(소장:이인성 영어영문학과교수)에서는 숭실대학교 설립자인 베어드 선교사 가족(모두 5명의 한국 선교사)에 대한 자료를 발굴, 소개하고,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작업을 작년부터 진행해오고 있다. 그 첫 열매로 단행본 [베어드와 한국선교]가 곧 출간될 예정이다. 이에 앞으로 총 7회에 걸쳐 그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 연재순서
①. 애니 베어드의 선교문학의 세계
②. 윌리엄 베어드와 한국선교
③. 윌리엄 베어드와 숭실대학
④. 윌리엄 베어드와 문서선교
⑤. 애니 베어드와 문서선교
⑥. 로즈 베어드와 한국선교
⑦. 역사의 베어드, 베어드의 역사

 

조선에서의 근대교육에 대한 연구는 흔히 서울의 배재학당과 경신학당으로 대표되는 교육활동과 이에 맞서 평양에서 펼쳐진 숭실학당의 교육활동이 비교 연구되어 왔다. 1885년 조선에 들어온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복음전도의 자유가 허락되지 않았지만, 그해 곧바로 서울에서 교육사역을 시작하였다. 감리교의 아펜젤러는 1885년 11월 고종황제로부터 학교설립 허가를 얻어 2명의 학생으로 한국근대교육의 효시인 배재학당을 시작하였고, 장로교의 언더우드는 1886년 5월 11일 고아원 형태의 교육사업인 ‘예수교학당’을 시작하였다.


한편 평양에서는 청나라와 일본이 조선을 전쟁터로 삼아 벌인 청일전쟁이 일어나고, 1897년 10월에서야 베어드가 사랑방학급으로 불리는 평양학당을 시작하였다. 이후 베어드의 평양학당은 숭실학당으로, 1906년에는 숭실대학으로 발전하여 한국 최초의 근대대학이 되었다. 서울에서건, 평양에서건 이들 기독교 교육기관들은 조선 최초의 근대교육기관이요 모델학교라는 점에서 특별한 가치들을 지니고 있다.

 
이 두 지역의 교육기관 가운데 이 글은 평양의 대표적 교육기관이었던 숭실대학과 그 설립자 윌리엄 베어드를 다루고 있다. 평양의 교육기관과 그 설립자 베어드에 관한 연구는 서울의 교육기관의 설립자인 언더우드나 아펜젤러에 비해 매우 미미하다. 또한, 베어드가 토착적 기독교 교육을 주창하며 근대 조선 최초의 초등학교부터 대학교를 총망라한 교육시스템을 창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업적이 상대적으로 저 평가되어 있는 현실에서 이 글이 베어드 연구에 일익을 하기를 바란다.


베어드는 한국에 건너와 40여년 동안 이 땅의 복음전도와 문명계도를 위해 헌신해 왔다. 1891년 1월 29일 부인과 함께 일본을 거쳐 부산에 도착한 후 부산, 대구, 평양에서 전국을 순회여행하면서 선교와 교육에 헌신해왔다. 부산에서 선교지부를 조직하고 다시 대구 선교지부를 옮겨 개척하였고, 서울에서 1년 사역한 뒤, 1897년 평양에 정착하여 본격적으로 교육선교사역에 투신하였다. 1897년에서는 숭실대학전신인 평양학당을 설립하여 한국에서 근대대학 교육을 개척하였고, 성서, 교리서를 서술하여 기독교 문서출판에도 공헌하였다.


이 글은 이러한 베어드의 사역 중 교육사역 그 중에서도 평양의 숭실대학에서의 교육사역에 중점을 두어 다루고 있다. 특히 조선선교부의 요청으로 네비우스의 선교방법론을 적용하여 작성한 베어드의 <우리의 교육정책>이 무엇이며, 거기에 나타난 교육이념이 무엇인지를 소개하고 있다. 아울러 이 <우리의 교육정책>이 그가 설립한 숭실학당과 숭실대학에 어떻게 구체적으로 적용되었으며,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 분석하고 있다.

▲ 한국기독교계의 지도자 한경직 목사
▲ 한국 근대 음악의 거두 현제명

19세기말부터 대각성 운동과 선교운동의 영향으로 하나의 개신교회를 향한 에큐메니칼 운동이 본격화 되었다. 그리하여 1900년 뉴욕, 1910년 에딘버러에서 에큐메니칼 선교대회가 개최 되었고, 교육사역을 포함한 피선교지에서의 개신교 교파 합동사업의 추진이 강력하게 장려 되었다. 조선에서도 대부흥운동 준비기간 중에 선교사단체들과 교인들 사이에 긴밀한 접촉이 있었고, 관서지방의 급속한 사업발전에 의해 연합이 추진되었다. 당시 평양에 감리교 계통의 중등학교가 없음으로, 신자들 간에 실업계 고등학교 설립을 청원하는 진정서를 선교본부에 자주 제출하였다. 이러는 동안 선교사들 간에 교육사업 연합안이 점차로 표면화 되었다.


1905년 6월 북감리교 선교부 총회가 서울에서 열렸을 때, 총회는 교육문제 토론회에 다른 교파의 선교사들도 참석하도록 초청하였다. 이 총회에서 베어드는 조선내 고등교육에 있어서 장로교와 감리교와의 협동 방안을 제의하였다. 이 흐름 속에 1905년 9월 감리교와 장로교가 합동하여 ‘한국복음주의 선교연합공의회’(The General Council of Protestant Evangelical Missions in Korea)를 결성”하여 “선교지역의 분할, 교회학교의 커리큘럼 제작, 병원 경영, 기관지 출판(The Korea Mission Field), 찬송가 편집” 등의 합동 사업을 진행하였다.


베어드의 많은 노력의 결과 1906년 합성숭실대학(The Union Christian College)이 감리교회와 연합으로 출범하게 되었다. 이렇게 관서지방에 있는 2개 선교지부는 교육사역에 합작하였다. 베어드는 이 합작이야말로 “그해의 특기할 사항중의 하나”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숭실대학의 경영은 북장로교와 감리교뿐만 아니라, 1912년 남장로교와 호주장로교도 참여하였고, 몇 년 뒤 카나다 장로교도 참여하였다.


장감 양 선교부의 연합 사업으로 숭실 중학 학생 수가 증가하기 시작하여 1905년에는 160명이었던 학생이 1906년에는 225명으로 늘어났다. 학생 수가 증가하고, 교사 증축의 필요성이 대두되자, 평양 시내의 교인들과 주민들은 과학, 산업교육관의 신축을 위하여 6,000원을 모금하였다. 또한 캔자스(Kansas)주 위치타(Wichita)에 있는 제일감리교회는 이 건물의 신축비로 2,500달러를 기부하였다. 이리하여 감리교회에서 세운 첫 번째의 학교건물이 낙성되어 과학관, 즉 격물학당이라 명명되었다. 1909년에는 장로교 선교부가 7,00달러를 들여 대학건물을 짓기 시작하여, 1911년에 미국교회의 도움을 받아 중학교 동편에 3층 벽돌 양옥을 기공하여 1912년에 준공하였다.

 

 

조선 최초,초등학교부터
대학교를 망라한 교육시스템 창출

 


숭실대학 초창기 수학 연한은 4년이었다. 1907년 장로교 연례보고서에 의하면 그해에 숭실학교 대학부 3학년이 5명이며 2학년이 7명이라고 하고 있어 1908년 4년제 대학으로 첫 졸업생을 배출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숭실대학 초기인 1909-1910년의 교과목은 성서, 수학, 물리학, 자연과학, 역사학, 인문과학, 어학(영어), 변론, 음악 등이었다. 그러나 1912-1913학년도 교과과정을 보면, 자연과학분야에서 물리, 생물, 화학, 농학, 임학, 지질학, 광물학 등의 강의가 개설되었고, 사회과학분야에서는 경제학, 경제사, 사회학, 민법 등의 강의가 개설 되었으며, 어학분야에서는 영어, 조선어 고전, 논어 등의 한문이 첨가 되었고, 새로 일본어가 개설 되었다. 그 밖에 실과에서 공작 시간이 배정되었다. 이는 대학의 교과과정이 이전에 비해 많이 정비되었음을 보여준다.


합성숭실대학이 출범하자, 감리교회는 교수진으로 최고수준의 세 사람을 지원하였다. 베커(A. L. Becker) 목사가 학교의 서기 겸 회계로 물리학과와 화학과의 학과장을 맡았다. 블리스 빌링스(Billss Billings)목사는 수학과의 학과장을 맡았다. 장로교 측에서는 베어드가 교장, 조지 맥쿤과 엘리 모우리, 베어드 부인이 전임교수로 일했다. 기계창(안나 데이비스 숍)에서 일하는 로버트 맥머트리(Robert McMutrie)는 대학과 학당의 근로 학생들을 지도하였다. 한국인 교수는 1905년 3명이었으나, 1909년에는 모두 6명이 되었다. 이것은 한국인 교수의 비중이 점점 높아지고 있음을 말한다.


이렇듯 숭실대학은 1987년 10월 10일 베어드의 사랑방에서 ‘중등반’으로 시작되어, 1901년 숭실학당으로 발전하였고, 1904년 5월 15일 3명의 첫 중학교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1905년에는 실질적으로 대학과정의 교육이 시작되었고, 1906년 8월에는 장로교 선교부로부터 숭실대학교 내에 대학부 설치를 허가 받았다. 그리고 1906년 8월에 감리교 선교부에서 숭실대학 대학부의 경영에 참여하게 되고, 아울러 1906년 가을에 합성숭실대학의 교명으로 정식출범하게 된 것이다. 1908년에는 대한제국 정부 아래에서 조선 최초의 4년제 대학, 합성 숭실대학으로 인가되었고, 그해에 대학부 졸업생 2명을 배출하였다. 이리하여 10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초등학교로부터 대학부까지 일관한 기독교학교체제가 관서지방에 건립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당시 미국 북장로교 선교본부는 다른 나라와는 달리 조선에서는 네비우스 선교방법론에 입각한 새로운 교육시스템을 모색하고 있었다. 북장로교 선교부의 교육고문으로 사역하고 있던 베어드는 서울에서의 교육경험을 반성하며, 1897년 “우리의 교육정책”을 발표하여 기독교교육의 기본 정책을 수립하였다. 여기에서 베어드는 미션스쿨은 토착교회의 설립과 그 지도자들을 육성해야 하고 철저히 전도의 일환으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베어드는 조선에서의 교육제도를 선교사의 관할 하에 조선인이 자립적으로 운영하는 초등학교, 조선인을 초등학교의 교원으로 양성시키는 단기사범, 그리고 초등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을 선교사들이 교육하는 중등교육, 혹은 고등교육으로 구분하였다. 그리고 토착적 교육이념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조선어 교재의 연구 및 개발을 들었다. 이것은 근대 조선 최초로 초등학교부터 대학교 까지를 총망라한 광범위한 교육시스템의 창출이었다.


베어드가 추진한 토착적 기독교 교육은 평양을 비롯한 서북지방의 교회발전을 기반으로 한 초등교육에 뿌리를 두었고, 이것은 숭실학당과 숭실대학으로 꽃을 피었다. 특히 베어드는 자신의 교육이념에 중국 산동성 등주에 있는 칼빈 마티어(Calvin Mateer)의 기독교 토착교육론을 받아들여 조선의 실상에 맞게 더욱 더 발전시켰다. 그리하여 조선 문화와 전통으로부터 괴리되지 않은 조선인 지도자의 양성을 교육의 목표로 하였다. 또한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 되자, 베어드는 일본과의 대항을 의식하며 감리교와 연합한 교육의 효율화와 교육제도의 강화를 시도했다. 그 결과 1906년 감리교와 장로교의 연합으로 합성숭실대학이 탄생하였고, 식민지하에서도 그 지배를 상대화 시킬 수 있는 교육공간을 창출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 교육 공간, 곧 숭실은 베어드의 교육이념에 기초하여 수많은 교회와 사회 지도자들을 배출하였다. 한국기독교계에서는 한경직, 박형룡과 같이 기라성과 같은 지도자들을 배출하였고, 음악계에서는 한국최초로 근대 서양음악을 수용하여 안익태, 현재명, 김동진과 같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또한 노동을 중시하는 실용주의적 사고를 바탕으로 과학기술교육을 중요시하여 한국사회의 근대적 진보에 기여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베어드의 교육이념은 숭실인들에게 민족의식과 국가의 자주, 독립사상을 고취시켜 숭실을 민족운동의 본거지가 되게 만들었다. 3.1운동 당시 박희도, 김창준을 비롯하여 조만식 등 수많은 숭실인들은 일제 식민통치 기간 내내 조선 독립을 목표로 하는 민족운동을 펼쳤으며, 일제의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학교를 폐교하기까지 하게 되었다. 이러한 민족정신은 베어드의 기독교적 교육이념과 정신에 힘입은 것으로 오늘도 평양 숭실을 거쳐 서울 숭실에서 수많은 숭실인들에게 끊임없이 영향을 주어오고 있다.



발제: 김명배 교수(서울장신대)
정리: 이인성 교수(한국기독교문화연구소)





저작권자 © 숭대시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