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착각』허수경 저
                                     『오늘의 착각』허수경 저

  허수경 시인은 경남 진주에서 태어나, 독일 뮌스터에서 사망했다.

  이 책의 초록빛 띠지를 걷어내니 장정 전체를 단일하게 물들인 감색이 아름답게 다가왔다. 제목의 글씨는 시카고 타이프라이터 폰트 느낌으로 처리되어 있다. 제목 밑에는 세로 행으로 ‘허수경 유고 산문’이라는 글씨가 흐릿한 보랏빛으로 심어져 있다. 가로 행만큼, 세로 행으로도 쓸 수 있는 한글이 어느 제삿날의 위패처럼 단아하다. 장정은 머메이드(mermaid) 종이류를 사용했다. 종이 질감이 인어의 비늘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두껍게 처리된 머메이드 종이는 빛을 반사하지 않고 일정 부분 흡수한다. 옅은 감색이 빛을 시나브로 머금어서, 책의 장정은 시들어가는 꽃내음 같다.

  지금은 가을이니까, 며칠 전은 늦여름이었다. 그때 속초에 내려갔었다. 강원도 속초시 중앙로 45길에는 ‘문우당’이라는 책방이 있다. 오래전 시아버지가 개업한 책방을 물려받은 며느리의 머리칼도 이제 희끗희끗하다. 이 쯤에서 『오늘의 착각』을 구입하면 좋을 듯싶었다. 소소한 기쁨이란 이런 책이 이런 책방에 어김없이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책을 열기 전에 가만히 뒤집어 보니 후 면에 작가의 글귀가 좀 더 가만히 적혀 있다.

  “착각은 우리 옆에 뒤에 그리고 언제나 있다. 방향을 가리키는 전치사와 후치사 사이에 삶은 있다가 간다. 방향을 잃는 것은 인간의 일이다.”

  허수경의 초기 시집 『혼자가는 먼 집』은 다섯 번을 샀다. 책장을 살피니 그중에 한 권도 없다. 갖고 다니며 읽었다. 책장에 꽂혀 있을 수 없는 책이다. 그러다가 좋은 사람이거나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 책을 건넸다. 읽던 책인데 모두 잘 받아주었다. 장소를 떠나는 책이 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의 착각』의 내용에 대해서는 아직 한 줄도 쓰지 못했다. 늦여름의 속초에서 구입한 시인의 유고 산문집은 이번 첫눈이 희끗이 내릴 때 열어볼 작정이니. 책아, 하지만 그전에 떠나고 싶으면 이 책장을 떠나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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