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경세상만사 <9>



학창시절, 학교에 있는 시간이 너무 많아 집은 꼭 여관같다고 느꼈던 때였다. 공부 하기 싫었던 나는 필사적으로 학교에서 할만한 다른 취미를 찾았다. 결과적으로 감독을 도는 선생님의 눈길을 피해 책을 읽는 것을 택하게 됐다. 친구들과 돌려 봤던 책의 내용이 전부 건전하지만은 않았다. 팬픽을 돌려 보는 것도 허다했고, 로맨스소설이 은근히 야할 수 있다는 걸 감지한 친구들은 늦은 하교길에 대여점에서 빌려온 책을 다른 친구들에게 전파하곤 했다.

 

 


그렇게 만나게 된 게 앤드류스의 소설이었다. 10대 시절에 계단에서 떨어지는 사고로 불구가 되어 평생 2층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글을 썼다는 그녀의 이야기는 소녀가 주인공이었지만 로맨스라기보다 다크호러물이었다. <다락방의 꽃들>이라는 그야말로 소녀틱한 제목에도 불구하고 내용은 심히 악취미로 가득했다. 사치스럽기만 한 엄마의 무책임하고 부도덕한 계획과 감금, 살해 계획, 조모의 학대, 근친상간까지. 주인공 캐서린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던져진 채 어떤 보호자도 갖지 못한다. 물론 보호자처럼 보이는 사람은 도처에 등장하지만, 그들은 주인공을 물질과 사랑으로 속박하고 상처와 폭력을 대물림한다. 해피엔딩은 없고, 비극은 되풀이된다. 말 그대로 ‘소녀들의 지옥’이다. 더욱 무서운 것은 이 지옥도는 소설 속의 이야기만이 아니라는 것. 혀를 차고, 가슴을 쓸어내리게 하는 이 시대의 극악무도한 기사에서 ‘소녀’의 이야기는 빠지는 법이 없다. 내가 부모라면 세상 무서워 딸을 낳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세태가 험악하기 그지 없다.


이럴 땐 만화 <파파 톨드 미>를 읽는 게 제격이다. 치세는 엄마 없이 아빠와 단둘이 살지만, 구김살 없고 자존심 높게 자란 아이다. 세상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지만, 어른들에게 우린 “케이크 위에 예쁘게 장식된 딸기는 아니”라고 제법 자기 목소리도 낼 줄 안다. 이 만화는 딸의 시각만큼이나 아빠의 시각도 같이 보여주고 있다. “불안이나 고통은 멀리 하고 바라는 건 뭐든 이뤄지리라는, 기대감에 찬 나날들로 이 아이를 감싸주겠다”는 죽은 엄마와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지만 “양팔을 한껏 벌린 폭만큼은 안전한 장소를 만들어줄 수 있을거라 생각했음에도” 그런 장소가 점점 좁혀져가고 있기만 한 것에 안타까워 하기도 한다. 그럴 땐 또 딸이 아빠에게 말을 건다. 아프면 지고, 울면 진다고. 그런 이야기에 반응해서 속상해하고 강해 보이려 과도하게 애쓰고 안달복달하면 할수록 힘은 저쪽으로 가는 거라고. 그 외에도 이 만화엔 공감가는 얘기가 참 많다. 앤드류스의 소설처럼 현실의 잔혹한 면을 정확하게 짚어 내면서도, 소설이 ‘잔혹’한 세상의 일면만 주목하는 것과 다르게 <파파 톨드 미>는 굳세게 살아갈 수 있도록 ‘따뜻함’도 그려낸다. 동화같이 알콩달콩한 세상을 보며 지쳐버린 마음을 치유하고 싶은 이들에게 꼭 쥐어주고 싶은 만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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