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익태(1906~)와 카라얀(Herbert Karajan, 1908-1989) 두 사람은 모두 지휘자로서 세계무대에서 활동한 음악가로 안익태는 일제 강점기에 친일 활동으로 그리고 카라얀은 2차 세계대전 중 나치활동으로 지탄을 받은 인물이기도 하다. 안익태는 친일 활동으로 그의 생애를 부정당하고 있는 데 비하여 카라얀은 친나치활동을 용서받고 세계적인 지휘자로 생애를 마친 사람이다. 안익태는 1919년 3·1운동이 터지자 평양에서 독립운동을 하였고 일본 경찰의 지목 대상이 되고 퇴학을 당했고, 숭실학교에서는 3·1운동 이후 친일교사 추방 데모 주동을 하여 무기정학 처분을 받기도 했다.

  안익태는 해방 이후 조국에 헌신하겠다는 생각으로 국제음악제를 열었다. 당시 한국은 벵글라데쉬, 카냐와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세 나라 중 하나였다. 당시의 공연은 쟁쟁한 세계적인 스타들이 출연하여 한국 사람들은 귀호강을 하였다. 이 공연은 안익태의 노력으로 세계 최고의 연주가들을 무료 출연시켜 성사된 것이다. 
안익태가 일제에 협력한 것은 사실이다. 오늘날의 형편에서 그를 친일음악가로 매도하지만, 그가 친일을 하지 않았더라면 안익태는 음악활동을 할 수 없었다. 일제에 협력하지 않고는 관현악을 작곡하고 관현악 지휘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친일은 당시 지식인이 겪어야 할 고난의 십자가였다고 생각한다. 

  일제 강점기 음악인의 활동을 논하면서 다른 나라에서는 어떻게 처리했는지 살피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의 우상화에 힘을 기울이던 괴벨스는 카라얀을 십분 활용하였다. 카라얀은 1944년 4월 19일에 파리에서 히틀러 생일 경축음악회에서 지휘를 하였다. 전쟁이 끝나자 그는 나치당원 경력으로 인해 소련 점령 당국에 의해 지휘를 금지당했다.

  이렇게 카라얀의 활동이 금지되자 소프라노 크리스타 루트비히는 ‘그는 단지 베를린 필과 빈 필을 지휘하고 싶었을 뿐’ 이라고 옹호해 주었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호응하여 히틀러 치하에서 예술가들은 활동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나치당에 가입해야만 했다는 것을 인정해 주었고 카라얀은 공연 금지 조치가 해제되어 활동을 재개하였다. 

  그는 35년간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로 재직하였고, 최고의 명성을 누렸다. 

  한 인간의 삶을 흑백 논리로 재단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지금도 북에는 수많은 음악인이 김씨 가문의 우상화에 참여하고 독재 정권에 협력하고 있다. 앞으로 통일이 되면 우리는 이들에게 돌을 던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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