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민주화운동은 1980년 광주 및 전남지역에서 일어나 대한민국을 지금의 민주주의 국가로 만든 역사적인 운동이다. 1980년 광주의 봄, 고립과 피비린내 나는 죽음 앞에서 이들이 목숨 걸고 지키려 했던 민주주의는 오늘날 민주주의를 사는 우리에게 동력의 바탕이 됐다. 이런 의미에서 지난 14일(토)과 15일(일) 본교 사회대에서 주최한 5월 광주 역사 기행은 더 뜨거운 참여로 마무리됐다.

  첫날인 14일(토)에는 △5.18 민주화운동기록관 관람 △금남로 일대 △5.18 자유공원 관람으로 진행됐으며, 둘째 날인 15일(일)에는 전남대학교와 국립5.18민주묘지를 관람했다.

  본지 또한 광주에 가서, 광주에서만 느낄 수 있는 현장의 생생함을 취재하고 왔다. 민주화를 외쳤던 광주 시민들의 1980년 5월을 그 공간에서 마주해보자.


  DAY1 

  “광주의 5월은 제삿날이 가장 많은 날, 여전히 7살 난 아들이 어디 갔는지 알고 싶은 아버지가 살고 있다”

  첫 번째 기행지는 5.18 민주화운동기록관이었다. 안내해설사의 설명으로 진행된 5.18 민주화운동기록관에서의 기행은 5.18 민주화운동의 전반적인 이해에 도움을 줬다.

  입구에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깨진 유리창은 총알의 흔적을 오롯이 안고 있었다. 이는 5.18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헬리콥터 사격 흔적이지만, 전두환 전 대통령은 끝까지 이를 부인했다.

  5.18 민주화운동기록관에는 당시 기자들의 취재 수첩과 관련 자료들이 많았지만, 관람하던 학생들을 멈춰 세운 건 바닥에 전시된 널브러진 신발이었다. 계엄군의 총격에 벗겨진 신발과 옷가지들은 당시 금남로를 재연하여 보는 이를 엄숙하게 했다. 또한 5.18 민주화운동기록관에 전시된 사진은 흑백사진임에도 생생하리만큼 선명했다.

  지난 1980년 5월 19일(월), 계엄군의 구타로 청각장애인 김경철 씨가 사망했다. 그러나 언론에는 단 한 장의 사진도, 단 한 줄의 보도도 없었다. 광주의 모든 언론이 탄압 받았기 때문이다. 같은 날, 김영찬 학생은 계엄군이 쏜 연속 실탄으로 부상을 입었다. 그러나 여전히 민주화운동은 학생 중심의 소규모 저항으로 이뤄졌다. 이틀 뒤인 5월 21일(수)부터는 총격이 이어지고 사망자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많아졌다. 군부 세력은 일반 가정집과 병원 응급실에도 공격을 가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계엄령 해제’ △‘전두환 퇴진’ △‘김대중 석방’을 외치며 행진하던 광주 시민들에게 언론은 ‘광주가 폭동을 일으켰다’, ‘북한 간첩이 침투했다’고 보도했다. 당시 시민들이 만든 언론인 투사회보의 ‘계엄군이 발포하지 않는 한 먼저 발포하지 않는다’는 가이드라인과 대조되는 모습이다.

  5.18 민주화운동은 사상자보다 행방불명자가 더 많다고 한다. 안내해설사는 “광주에는 여전히 7살 난 아들이 어디 있는지 알고 싶은 아버지가 살고 있다”며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5월은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성년의 날 등 다양한 행사가 많은 날이다. 그러나 안내해설사는 “광주의 5월은 제삿날이 가장 많다”고 표현했다.

  역사의 증언, 전일빌딩245

  금남로 일대 곳곳을 돌아다니며 당시 광주의 거리를 떠올릴 수 있었다. 특히 옛 전남도청 바로 앞에 위치한 전일빌딩245는 5.18의 흔적을 생생하게 담고 있었다.

  특히 본지 기자는 ‘오월어머니, 그 트라우마’라는 사진전에서 충격을 받았다. 오월어머니란 좁게는 5.18 민주화운동의 여성 희생자나 유족을, 넓게는 모든 민주 항쟁의 여성 가족을 의미한다. 전시된 사진들은 민주화운동 때 가족들이 희생된 곳에서 촬영됐다. 사진 속 인물들은 과거 기억을 현재로 소환해낸 듯 했다. 5.18 민주화운동기록관에 전시된 흑백사진이 과거의 현장 상황을 순간적으로 보여줬다면, 전일빌딩에서 진행된 이번 사진전은 오늘날 희생자들과 유족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내며 어제의 아픔이 오늘도, 내일도 선명하게 기억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전일빌딩245에서 바깥 테라스로 이동하면서 옛 전남도청을 볼 수 있었다. 옛 전남도청은 5.18 민주화운동의 상징적인 장소다. 당시 항쟁 본부가 있었던 곳으로, 계엄군의 무력진압에 맞선 시민들의 희생이 있었던 장소이기 때문이다. 테라스에서 바라본 옛 전남도청과 그 앞 분수대 광장은 당시 민주화운동을 위해 모인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향해 외치는 뜨거운 함성이 들리는 듯 했다.

  “또 허고, 또 허고, 또 허고 하니까.”

  세 번째 기행지는 5.18 자유공원이었다. 5.18 자유공원은 당시 시민들이 군사재판을 받았던 법정과 영창, 고문을 받았던 식당 등을 복원하고 관련 자료를 전시해둔 곳이다. 5.18 자유공원에서는 지난 1980년, 5.18 민주화운동에 직접 참여해 취조를 받고 고문을 받았던 이용진 선생님께서 각 공간을 소개해주며 생생한 당시 상황을 전달해주었다.

  희생자들이 직접 수감됐던 영창에도 들어갈 수 있었다. 약 50명의 사람들이 들어가자 좁은 영창은 가득 찼지만, 당시 영창에는 한 소대에 130명에서 150명이 수감됐다고 한다. 주동자로 지목돼 고문을 받고 조사를 받기 위해 나가는 상황을 제외하고는 나가지 못해 전염병이 돌기도 했다. 이 선생님은 “21살 꽃다운 나이에 고문받으며 할 수 있는 말은 차라리 죽여달라는 말밖에는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구타와 발바닥 고문을 포함한 물고문, 고춧가루 고문의 상황을 생생하게 설명하는 이 선생님의 얼굴에는 그때의 아픔이 묻어났다. 이후 5.18 자유공원을 찾는 사람들에게 당시의 기억을 떠올려 설명하면 아픈 기억이 떠오르고 힘들지 않냐는 질문에 그는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할 일이기에 이 일을 계속하고 있다”고 전했다.

  5월 이후에도 이들의 고통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지난 1980년 10월 25일, 법정에서는 이미 정해진 재판이 시작됐다. 피고인이 고용하지 않은 변호인은 전 전 대통령을 변호했고, 사형 선고와 형량은 판사가 도장을 찍듯 이름을 부르며 형을 내렸다고 한다. 당시 이 선생님께서도 25년 형을 선고받았다. 한편, 전 전 대통령은 안정적으로 정권을 잡자 자신의 가한 일을 무마하기 위해 이들을 교도소에서 조기 석방했다.

  그러나 여전히 이들은 20년 동안 관리 대상이었다.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에서 24시간 감시하기도 했다. 광주의 민주화는 지난 1980년 5월에 머무르지 않았다. 이후에도 민주화를 위해 끝없이 투쟁했고, 이는 오늘도 선명한 궤적으로 남아있다. 이 선생님은 “20년 동안 300번을 잡혀가도 또 하고, 또 하고, 또 했다”고 말했다.

  오래된 상처는 치유되지 않은 채 마음 깊은 곳에 스며들었고, 제대로 된 사과를 받지 못했음에도 사회는 시간에 따라 흘러왔다. 아물지 않은 상처들은 건강하지 못한 상태로 42년 넘게 흘러왔다. 5월 광주 역사 기행의 첫째 날은 분노와 혼란의 교차 속에서 마무리됐다.


  DAY2 

  전남대학교...“이곳은,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 찬연히 빛나는 5·18 광주민중항쟁이 시작된 곳이다.”

  전남대학교는 5·18 민주화운동 역사를 간직한 채 남아 있었다. 지난 1980년 5월 17일(토) 밤, 전남대학교에 진주한 계엄군은 도서관 등에서 공부하던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구타하고 불법 구금했다. 계엄군은 5월 18일(일) 아침 학교에 등교하거나 항의하기 위해 정문 앞에 모인 학생들을 강제 해산시켰다. 이어 5월 18일(일) 오전 10시경, 교문 앞에 모여든 학생들이 학교 출입을 막는 계엄군에게 항의하면서 최초의 충돌이 있었다. 이에 학생들은 굴하지 않고 광주역과 금남로로 진출해 항의 시위를 벌였다.

  전남대학교 정문은 5·18 사적지 목록 1호로 지정됐다. 이곳은 지난 1980년 5월 18일(일) 오전 10시경, 교문 앞에서 학생들이 학교 출입을 막는 계엄군에 항의하면서 최초 충돌이 일어난 곳이다.

  본교 사회대는 전남대 탐방을 위해 전남대 사회과학대학 학생회와 함께했다. 전남대 사회과학대학 학생회는 본교 사회대 학생들과 학교 곳곳을 다니며 5·18 민주화운동의 흔적을 안내했다.

  정문에는 5·18 사적표지석이 있다. 사적표지석 가운데에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는 모습의 청동 조각품이 붙어 있다. 학생들이 계엄군에 항의하면서 항쟁의 불씨가 된 곳임을 나타내는 듯했다.

  전남대 사회과학대학 건물 앞에는 오월항쟁의 대변인인 윤상원 열사의 흔적이 있다. 윤상원 열사는 지난 1950년 전남 광산군 임곡면에서 태어나 지난 1971년 전남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지난 1980년 5월 18일(일)부터 돌아가신 5월 27일(화)까지, 윤상원 열사는 5·18민중항쟁 초기부터 시위에 참여하고 항쟁 마지막 날까지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윤상원 열사는 5월 27일(화) 새벽, 윤상원 열사는 중무장한 계엄군의 진압 작전에 마지막까지 항전하다 도청 민원실 2층에서 계엄군의 총탄에 장렬히 숨을 거뒀다. 최후의 항쟁에서 윤상원 열사는 학생들을 불러놓고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은 이 모든 과정을 지켜봤다. 이제 너희는 집으로 돌아가라. 우리들이 지금까지 한 항쟁을 잊지 말고 후세에도 이어가길 바란다. 오늘 우리는 패배할 것이다. 그러나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이다.”

  전남대 내에는 ‘김남주기념홀’도 있다. 김남주 시인은 80년대 한국민족문학을 대표하는 사람이자 사회변혁운동의 이념과 정신을 온몸으로 밀고 나가 혁명적 목소리로 한국 문단을 일깨운 민족 시인이다. 그는 반독재 투쟁에 앞장서다 청춘의 10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김남주 시인은 전남대 영문과에 재학 중이었다. 그는 최초의 반유신투쟁을 위한 지하신문 <함성>과 <고발>을 제작하고 유포하다가 지난 1973년 구속됐다. 김남주 시인은 옥중에 교도관 몰래 수많은 옥중시를 써서 극비리에 유출했는데, 이 시들은 80년대 우리 사회 변혁 운동에 일대 도화선이 됐다. 그러던 중 오랜 감옥 생활과 석방 뒤의 과로 등이 겹쳐 얻은 췌장암 투병 끝에 운명하셨다.

  “물러섬 없는 투쟁은 때론 우리에게 죽음을 가져다 준다는 것, 그리고 그 죽음으로 인해 수백 수천만이 마침내 깨어나 거대한 폭풍처럼 불의와 억압, 착취를 쓸어버린다는 것”

  전남대 내에는 ‘5·18 광장’이 있다. 도서관 앞 봉지 주변에 자리한 5·18광장은 지난 1980년부터 오늘날까지 수많은 시위와 집회가 개최됐던 민주화운동의 기념비적인 장소다. 지난 1980년 봄, 학생과 시민들은 이 광장에 모여 함께 민주화를 외쳤고, 이후에도 △5·18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독재정권 타도 △민주주의 확립 △평화통일과 참교육 실현 등을 요구하는 시위가 계속됐다.

  전남대 사회과학대학 정윤재 학생회장에게 대학생들이 5.18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를 물었다. 정 학생회장은 “5.18 당시에 전남대학교 학생들이 주도가 돼서 5.18이 진행됐다”며 “대학이라고 마냥 공부만 하는 곳은 아니기 때문에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하고 그들이 만든 편안한 세상에서 우리가 살고 있으니까 확실하게 기억을 하고 올바르게 진실을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실제 전남대 재학생으로서 5.18 민주화운동의 흔적을 느낄 때가 있다고 한다. 정 학생회장은 “아무래도 사적지 같은 곳이 전남대학교뿐만 아니라 광주에도 많이 퍼져 있다”며 “사회대 학생이다 보니 윤상원 동상이 항상 밖으로 나올 때마다 있어 그런 부분에서 피부로 많이 느낄 수 있다”고 밝혔다.

  5.18 국립묘지...민주영령들의 뜻을 올바르게 계승하라

  마지막으로 간 곳은 5.18 국립묘지다. 5.18 국립묘지를 찾아 참배하기 위함이다. 참가자들은 검은색 복장을 갖추기도 했다.
국립 5.18 민주 묘지는 지난 1980년 5.18 민주화운동 과정 속 희생자와 당시 부상을 당하다 구금돼 고문과 옥고를 치른 사망자가 안장돼 있는 곳이다.

  본교 사회과학대학 학생회 정지이(정치외교·18) 학생회장을 대표로 5.18 민주화운동 희생자들을 향한 참배가 진행됐다. 숙연한 분위기 속 울리는 음악은 추모의 뜻을 더욱 나타냈다. 다시금 이틀 동안의 기행 속 방문한 장소와 희생자들을 떠올리게 했다.

  이후 희생자들이 묻힌 묘역에 방문했다. 희생자들은 모두 사연이 있어 보였다. 생각보다 어린 희생자들도 존재했다. 희생자 묘석 뒤에는 그들의 인생을 나타내는 말들이 있는 경우도 있었다. 한 희생자의 묘석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오월?이 푸르른 날! 모든 사람들의 가슴속에 잊혀지지 않을 기억으로 남을 것입니다. 사랑합니다 아버지”


  이상으로 광주 역사 기행이 종료됐다.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역사 기행은 종료됐지만 직접 보고 느낀 그날의 역사는 마음속에 남아 있다. 대학생은 올바른 역사를 알고 앞으로 길이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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