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경세상만사 <11>



날이 춥다. 이번주 들어 갑자기 쌀쌀해지더니 첫눈까지 내렸다. 애인 있는 사람들은 전화로 만날 약속을 잡고 다음달에 있을 크리스마스 때문에 선물을 사야 하네 마네 다들 바쁜데, 고독한 솔로는 서럽기만 하다. 시린 옆구리로 컴퓨터 앉아 마음을 달랠 소식을 찾는다. 눈에 띄는 제목, ‘꽃미남 네 명이 한 자리에…’. 눈은 어느새 먹이를 노리는 매의 눈빛으로 돌변하고 클릭질은 매서워진다. 곧이어 모습을 보인 기사는 ‘꽃보다남자’ 드라마에 관한 이야기였다. 새삼 놀라웠다. 솔직히 말하면 좀, 아니 많이 유치했던 10년도 넘은 만화가 영화화는 물론이고 대만과 일본을 거쳐 우리나라에서까지 드라마화되다니?


유치하니 어쩌니 해도 나 역시 <꽃보다남자>를 열심히 봤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그 당시 유행하던 순정만화의 남자주인공은 학생들의 ‘종이남친’이었다. 멋진 로맨스를 꿈꾸지만 지나치게 어려운 미션-남자친구 만들기-을 수행할 자신이 없었던 나를 비롯한 친구들은 순정만화를 보며 여주인공에 나를 대입시켰다. 현실에 보기 드문 멋진 외모의 남학생들이 얼굴이 화끈화끈할 유치한 대사를 내뱉는 것도 만화 속에서라면 다 용납할 수 있었다. 가난한 부모가 신분상승해보겠다고 딸을 명문고에 입학시키거나, ‘세계서열0순위’에 버금가는 남주인공들의 휘황찬란한 소개나, 말 안들었다고 붙이는 레드카드로 인해 왕따가 되는 여주인공. 말 그대로 ‘손발이 오그라드는’ 이야기에 “진짜 병맛이다!”를 외치면서도 어느새 다음 권을 읽게 된 건, 그 때문이었다.


만화를 그렇게 읽었지만 드라마나 영화로 이어지지는 못했던 이유는 또 다른 멋진 ‘종이남친’ <다정다감>을 만나서다. <꽃보다남자>만큼이나 매력적인 남자주인공들이 만족스러운 로맨스를 펼쳤지만, 스토리는 그에 비해 훨씬 현실적이었다. 똑같이 고등학교가 배경이고, 상처입은 남주인공과 평범한 여주인공의 이야기였지만 ‘손발이 오그라들기’ 보다는 어딘가 저런 연인들이 진짜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을 줬다. 물론 살짝 겉멋들린 대사는 여전히 난무하지만, 지금에 와서야 그렇게 느끼는 것일 뿐이지 고등학교때 나는 그 대사들을 다이어리에 소중하게 적어 넣고 다닐만큼 좋아했다. 연애에 대한 고민뿐 아니라 학교나 친구에 대한 문제도 군데군데 등장했고 주인공 ‘이지’보다 더 멋진 친구가 주인공의 문제를 같이 고민해주는 모습은 내게 또 하나의 로망이었다.

 

 


순정만화는 맘에 차는 이야기를 만나기 참 어렵다. 그림체가 예쁜가 하면 내용이 재미없고, 내용이 재밌다 싶으면 주인공이 찌질하고, 주인공이 매력적이다 싶으면 대사가 마음에 안 든다. 대리만족을 하고 싶어 봤는데 마지막장 덮을 적이면 ‘이게 무슨 순정이냐, 판타지 혹은 액션이지 우어어어’하고 분노하게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럼에도 다정다감은 당시 최고 인기였던 꽃보다남자를 살포시 밀어내고 내 순정만화 베스트 목록에 당당히 꼽히고 있다. 오랜 기간의 연재를 거쳐 최근 완결이 났다. 오랫동안 봐 왔던 팬에게는 살짝 실망스러운 결말일 수도 있지만 ‘다정다감’ 특유의 분위기가 유지된 점은 좋았다. 옆구리 시린 당신, ‘종이남친’이라도 상관없다면 혹은 손발이 오그라들만큼 달달한 대사로 위안을 삼고 싶다면 <다정다감>을 보시라. 어느새 가상연인을 넘어 함께 학창시절을 난 동창이 된 듯 웃고 울고 공감하고 있을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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