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도(溫度)로 짓는 집
계절이 바뀔 때마다 자연스러운 공공의 권고처럼 “적정 온도”라는 말이 들리기 시작한다. 그 수치들은 일상생활의 기준이 되고, 마치 오래 검증된 과학적 합의처럼 변화하는 절기의 온도 ‘표준’이 된다. 그러나 그 기원을 더듬어 보면, 이 “적정 온도”는 단순한 생리학적 지표가 아니라 근대 과학과 제국주의가 함께 만들어낸 역사적 측면을 간과할 수 없다. 19세기 유럽 제국들은 열대 식민지, 제국의 병영에서 군인인 백인 남성의 신체를 보호하기 위해 쾌적성과 체온 변화에 관한 실험을 축적했고, 이를 바탕으로 특정 온도를 ‘표준’이라 규정했다. 이 표준은 보편적 진리의 모습으로 세계에 퍼졌지만, 사실 특정 인종과 기후적 조건에 기반을 둔 값에 가깝다. 혹서와 혹한이 극적으로 교차하는 한반도에까지 이 기준이 비판 없이 적용된 현상은, 과학적 보편주의가 가진 서구 중심주의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아파트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한국의 도시 주거들은 근대주의 건축이 가진 이런 ‘표준’의 보편성을 가장 적극적으로 흡수한 분야다. 근대주의 건축은 내부와 외부를 철저히 구분하고, 실내를 일정한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 기계적 장치를 적극적으로 도입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본격화된 실내의 ‘항상성(恒常性)’은 기술적 진보의 상징이자 도시적 편리함의 약속이다. 같은 평면, 같은 설비, 같은 단열 기준은 주거를 견고한 상품처럼 다룬다. 편리와 편안으로 길든 거주민은 바깥 기온을 잊은 채 생활할 수 있지만, 그 안락은 자연과의 교섭이 사라진 두꺼운 콘크리트 지붕과 벽을 의지하고 있다. 더구나 냉·난방 시스템에 의존한 집은 환경문제와 에너지 소비뿐 아니라, 계절과 날씨의 변화에 맞춰 몸이 반응하던 감각의 소실을 동반한다.
하지만 주거의 ‘항상성’은 역사적으로 오히려 예외 상태다. 세계 각지의 전통 주거는 지역적 미시 기후를 활용하고 계절, 시간대, 재료에 따라 내·외부를 조절하는 융통성과 세밀함을 보여왔다. 한반도의 전통가옥 또한 이런 기후적 적응이 흥미롭게 보이는 사례다. 겨울과 여름을 함께 담은 한국의 집, 겨울 집은 작게 쓰는 대신 여름 집은 넓게 쓰는 지혜가 있다. 매서운 겨울 추위에 온돌의 열은 작은 방으로 모이고 대청마루는 보조적인 역할을 한다. 반대로 뜨거운 여름이면 대청마루는 여지없이 집의 중심이다. 마당은 복사열로 상승 기류를 만들고, 처마는 그림자를 드리는 대류의 보조 장치가 된다. 이제 북쪽 숲의 서늘함은 산들바람이 되어 대청으로 자연스럽게 흘러온다. 이렇게 마루, 처마, 숲, 마당으로 연계해 이룬 집은 일정한 온도를 거부하고 위치, 시간, 계절에 따라 항시 변화하는 집이다.
지난 반세기의 도시화와 콘크리트 중심 개발은 이런 전통적인 집의 미시 기후 조절 모습을 완전히 소멸시켰다. 콘크리트 구조물과 아스팔트로 뒤덮인 건물의 외부는 도시를 극한의 온도 공간으로 만들었고, 건물 내부는 외부와 완벽히 분리된 “살기 위한 (온도) 기계”로 작동된다. 집의 에너지 보존과 효율을 앞세운 기밀성 강화는 오히려 계절과 절기가 말하는 냉·온·열의 감각을 약화한 보온병같이 폐쇄적인 건축으로 탈바꿈한다. 패시브하우스로 명명된 ‘친환경’의 두껍고 딱딱한 집에선 기후와 환경에 대한 거칠고 투박한 이해가 과학적 지식으로 재빨리 포장된다.
‘온도’라는 기본 감각의 층위를 회복하려는 “기후적 건축(Climatic Architecture)”은 이렇게 경직된 환경의 이해에 대한 반성이다. 여기서 건축은 절대적 단열을 위한 항상성의 용기가 아니라, 열·빛·바람·습기가 다양한 깊이로 흐르는 “열적 지형”으로 이해된다. 단일한 온도로 고정하는 근대적 실내 개념에서 벗어나, ‘온도의 겹(layered thermality)’은 서로 다른 온도가 연속하고 활동의 종류나 시간대에 따라 선택한 가능성의 공간이다. 이런 상상에는 거주자가 온도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반응할 수 있도록 “감각의 회복”을 돕는 내·외 구분이 혼재되거나 사라진, 집의 가벼운 ‘피부’가 제안된다.
근대주의 건축과 기계·기술의 맹신에서 탈피한 “온도로 짓는 집”에서 느껴지는 섬세한 감각의 회복이 인상적이다. 기후위기의 시대에 집을 단지 외부 온도를 차단하고 저항하는 막힌 보호막이 아니라, 이제 자연의 흐름 속에서 작동하는 온도의 열린 장(場)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냉난방 설비가 만든 표준화된 수치보다는, 건축이 자연과 맺는 관계의 중요한 단서로 온도가 포착되는 것은 어떨까?
건축 안에서 계절의 작은 떨림과 바람의 미묘한 이동을 느끼는 법을 다시 배우고 싶다. 이 감각의 회복이 집의 생명을 일으키고, ‘정주’의 가능성을 보다 유연하고 깊은 방향으로 확장하리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