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저녁 뉴스 시간에 한 유명 게임업체의 신작 한정판 판매가 엄청난 호응 속에 이루어졌다는 기사가 보고되었다. 밤새워 줄을 섰음에도 불구하고 한정판이라는 특성 때문에 구매하지 못한 시민들은 분통을 터뜨렸고, 오늘까지도 해당 게임에 관련된 낯선 사건을 보고하는 기사가 끊이지 않고 있다. 몇 주 전 문자로 대화할 수 있는 인기 스마트폰 앱 서비스가 약 10분 동안 중단되는 사태가 있었다. 서비스 공급 회사의 서버 문제가 발생한 지 1주 정도 지난 시점이었으며, 서비스 중단 원인도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급하게 서비스 복구는 이루어졌지만 예고 없이 서비스가 중단된 10분 동안, 사용자들의 반응은 차라리 분노에 가까웠다. 갑작스런 서비스 중단에 애꿎은 자신의 스마트폰만 두드려댔다는 사람부터 자신의
아마존 유역에는 나무늘보(sloth)라는 동물이 산다. 이 포유동물은 동작이 굼뜬 것으로 유명하다. 평상시에는 시속 12m 정도로 움직이며, 가장 빨리 움직일 때의 속도라 해봐야 시속 120m밖에 안 된다. 완전히 자란 나무늘보는 크기가 황소만 한 것도 있다는데, 이러한 크기의 동물이 그처럼 느린 속도로 움직인다면 사람이 여간 주의를 기울이기 전에는 그 움직임을 알아채기 힘들 것이다. 반면에 행동이 느린 나무늘보의 입장에서는 잰 걸음으로 다가가는 사람이 마치 사람에게 총알이 날아오는 격일 것이다. 우리가 날아가는 총알을 보지 못하는 것처럼, 나무늘보도 우리의 걸음걸이 속도로 다가오는 포식자를 잘 알아보지 못한다. 나무늘보의 신체적 한계로는 어차피 그와 같은 속도로 접근하는 물체를 피할 수 없으니, 볼 필
얼마 전 웹서핑을 하던 도중‘자체 발광 스마트폰 케이스’라는 독특한 아이디어를 접하게 됐다. 별도의 전원 장치가 필요 없이 케이스에 달린‘LED’가 빛난다는 것이다. 물론‘야광’의 경우에도 전원 장치 없이도 불이 들어오기는 한다. 그런데 필자가 본 그 케이스는‘야광의 원리’와는 다르게 전류가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먼저‘밤에 빛나다.’라는 단어 자체의‘야광’. 문자 그대로 낮에는 발광효과가 없어 보이다가, 밤이 찾아 오면그진가를 발휘한다. 야광은 인광체라는 물질의 특성을 이용한 원리다. 물질의 기본 단위인 원자는 원자핵과 그 주위를 도는 전자로 이뤄져 있다. 이때 밖에서 에너지를 받으면 전자가 원자핵으로부터 멀어진다. 다시 에너지를 잃으면 전자는원자핵에 가까워진다. 그런데 인광체라는 물질은
《말하는 대로 꿈꾸는 대로》를 읽고 지난 주 교양과목에서 뜻밖의 특강을 듣게 되었다. 숭실대 89학번으로서 대학을 중퇴한뒤사회를 먼저 배우고 돌아오신 선배님의 피와 살이 되는명강의였다. 수업시간을 넘기면서까지 강의했지만 그 누구도 경청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교실 안은 엄숙했다. 선배님의 인생은 하나같이 용기가 없으면 시도도 못해 볼 만한 귀한 경험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선배님의 말처럼 나도 꿈이 없는곳, 대학이라는 틀속에서 이도저도 아닌 모양새로 학점만 따다가 이도저도 아닌 사람이되어서 사회를 맛보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강의를 듣자마자 중앙도서관에서 《말하는 대로 꿈꾸는 대로》라는 책을 빌렸다. 나의 획일화된 꿈은,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일단 취직을 해서 돈을 버는 것이었다. 내가 정말
의학을 포기하고 사랑하는 조국의 국민들을 일깨우고자‘문학’이라는 과감한 길을 선택하는 루쉰의 모습에서 그의 조국에 대한 사랑과 문학에 대한 열정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잘 알 수 있었다. 문학가로서 그리고 교육자로서의 루쉰의 모습을 알고 싶어 하는 독자라면, 이 책을 통해 종이 속에서 살아 숨 쉬는 루쉰을 보며 그에 대해 알아가는 소중한 시간을 얻길 바란다.권 범(정통전·4)루쉰의 일생은 현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너무도 당연한 깨달음을 전해 주고 있었다. 이 책은 어지러운 사회 속에서 침묵하는 젊은 우리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루쉰의 일생을 통해, 보다 진취적인 사회 구성원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고민하게 만드는 책이다. 부조리를 침묵하며 지켜보기에는 우리 대학생이 가진 잠재력이 너무 아까운 것 같다. 거
모세와 여호수아의 영도력으로 오랜 세월의 이집트 노예살이를 끝내고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스라엘 12지파는 가나안 땅에서 지리멸렬하게 살고 있었다. 대부분의 지파는 가나안 토착세력들에게 밀려 또 다시 노예살이를 강요당하고 있었다. 야훼 하나님에 대한 충절과 신의를 저버리고 우상들을 섬기던 이스라엘은 가나안 토착 세력들의 잦은 공격과 압제적 지배 아래 서서히 소멸되어가고 있었다. 가나안 중부 지역을 할당받은 므낫세 지파에 속한 기드온도 남방에서 올라오는 미디안 침략군을 피해 아예 동굴로 피신해 살고 있었다. 이스라엘 온 지파들이 미디안의 압제에서 건져 달라고 아우성치고 있었건만, 기드온은 오불관언(吾不關焉)의 자세로 동굴 안에 칩거하며 일인분 인생을 간신히 부지하고 있었다. 이웃과 공동체의 고통에 무관심한
영화와 만화책 속의 스파이더맨은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캐릭터다. 자신을 희생하여 악당과 맞서는 용감한 청년 이야기다. 이 영화 속에는 아주 다양한 물리적 현상들이 보인다. 그 중에서 특히 영화 ≺스파이더맨 2≻에 나오는 핵융합 발전에 대해 알아보자. 이 영화에서 악당 닥터 옥터퍼스는 핵융합 연료인‘트리튬(삼중수소)’을 이용해서 새로운 에너지원을 탄생시키려 한다. 실제로 핵융합은 가벼운 원소(중수소와 수소)를 결합해, 무거운 원소(헬륨)로 만들때 발생하는 질량 차이를 이용해 에너지를 만드는 반응이다. ‘E=mc2’, 바로 아인슈타인의 질량-에너지 등가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미국 언론매체에 따르면‘세상에서 가장 비싼 물질 TOP 4’에 선정됐다. 무려 그 값이 삼중수소 1g당 3400만 원이
《왜 잘사는 집 아이들이 공부를 더 잘하나?》를 읽고 교육이 희망이었던, 아니 아스라한 꿈이라도 심어 주었던 시대가 있었다. 적어도 그 시절엔‘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에 대한 비아냥거림이 지금보단 덜했으리라. 이제 한국사회에서 교육은 부와 특권을 세습하는 수단이자 양극화의 주범으로 지목받고 있다. 이러한 세태에 저자는 결코 가볍지 않은 물음을 던진다.“왜 잘사는 집 아이들은 공부를 더 잘하는가?”그는 부모의 교육 수준과 직업 지위가 자녀의 학업 성적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준다는 선행연구들에 주목하고, 그런 현상이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 일어나는지를 밝히고 있다. 주된 근거로 저학력자들이 일생에서 학력 차별을 겪거나 자신의 열등한 처지를 극명히 체험하지 않는다는, 이른바‘학력가치 체감의 역설’을 제시한다.
“진리는 오래된 것이다. 다만 오류만이 새롭다.”저자 한형조는 말하고 있다. 오늘날 잊혀져 가는 주자학에 대해서 다시한번눈길을 돌려, 인간 본성에 대한 고민과 성찰의 의미를 부여하게 됐다. 동양철학에 관심이 많았지만 어려워서 접근하지 못했거나, 이 기회를 빌려 관심을 가지고자 하는 독자 모두에게 권하고 싶다. 주자학의 거장들을 통해 친근하게 접근할 수 있는 책이다.전용성 (정통전·4)이 책을 독파하며 16세기에서부터 18세기에 이르기까지 조선 대유학자들의 학문을 잠시나마 소인의 시선으로 훔쳐 보며 행복해하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또한 크게 느낀 사실은 그들의 진보가 과거없이 홀로 생겨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번 독서는 그들의 흐름이‘나’로 이어지고, 다시 그들로 돌아가는 뫼비우스의 띠의 일부분이
사사 드보라는 랍비돗의 아내로서 중부 가나안 지역에 살던 이스라엘 부족들의 재판관이었다. 평화시에는 이스라엘 부족들의 억울한 송사를 심리하고 재판해 주는 사사(師士)였으나,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전시 사령관이 되어 중부 가나안 정복 전쟁의 영도자로 부상한다. 드보라 시대의 중부 가나안 곡창 지대는 가나안 토착세력으로 인해 양식을 얻기가 매우 힘들었다. 4장은 당시의 중부 가나안 지역의 왕이 야빈이며, 그의 군대장관이 시스라고 말한다. 이들은 900승의 철병거로 중무장한 채 이스라엘을 20년 동안이나 압제하고 있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왕 야빈의 압제 아래 강제노동에 동원되거나 막중한 세금을 강요당하고 살았다. 거리와 대로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얼씬도 하지 않았고, 모든 상업도로나
‘냄비 근성’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한국인들이 고쳐야 하는 속성으로 자주 인용된다. 쉽게 달아오르고 금방 식어 버리는 냄비처럼, 특정한 이슈가 생겼을 때 큰 일이 난 것처럼 흥분하고 관심을 집중시키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언제 그랬냐는 듯 쉽게 잊어버리는 태도에 대한비판이다. 하지만 조금 다른 생각도 가능하다.오히려 우리를 둘러싼 환경과 상황의 급변성에 어울리는 합리적인 조응이 아니었을까?빠른 시간 내에 이루어진 관심의 집중과 망각은 새로운 정보의 유입과 확산을 위해 불가피했던 것은 아닐까? 잊지 않고 살기에는 우리에게 너무 엄청난 일들이 많았던 것은 아닌가? 정보의 양적 팽창과 함께 확산의 속도가 빠른 정보사회에서는 의제(議題)의 대체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여기에는 기존의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