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에 등장한 새로운 인간형의 하나로 스놉(snob)을 들 수 있습니다. 우리말로는 속물로 번역되는 말인데요, 스놉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기에 타자의 욕망만을 과도하게 욕망하며 타인의 의견 속에서만 살아가는 존재를 말합니다. 최지애의 「달콤한 픽션」(『달콤한 픽션』, 걷는사람, 2023)은 선영을 통해 스놉적인 삶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얼핏 보기에 이 작품은 이삼십대 대도시 여성의 일과 사랑을 다룬 전형적 칙릿(Chick-Lit)으로 보이기도 하는데요. 「달콤한 픽션」을 칙릿으로만 규정하는 것은 과대진술인 동시에 과소진
박지영은 독자들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새롭게 바라보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작가다운 작가 중의 한 명입니다. 박지영은 선(善) 뒤에 숨어 있는 악(惡), 피해 뒤에 숨어 있는 가해와 같이 우리 삶의 복잡한 면모들을 면도칼로 저며내듯이, 낱낱이 가르고 헤쳐 피가 뚝뚝 떨어지는 진실을 독자들에게 펼쳐 보이는 데 능숙한데요. 이번에 살펴보려는 「누군가는 춤을 추고 있다」(『이달의 이웃비』, 민음사, 2023)에서는 ‘모욕’이라는 감정을 해부하여 우리의 책상 위에 올려 놓고 있습니다. 모욕이란 말은 듣기만 해도 감정의 동요가 일어나는
김지연의 「반려빚」(『문학과사회』, 2023년 여름호)은 반려자나 반려동물처럼 빚과 평생 동안 짝이 되어 살아가야 하는 우리 시대 젊은이의 모습을 그린 소설입니다. 김지연은 주로 Z세대의 일상과 심리를 새로운 감각으로 형상화하고는 했는데요. 이번 소설은 이들이 겪는 채무라는 문제를 심리나 관계라는 미시적 차원에서 다룬 독특한 작품입니다. 신대륙의 정복자들은 단순한 탐욕이 아니라 상상을 초월하는 탐욕을 보여, 지금까지도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데요. 최근에 알려진 바에 따르면, 인간성을 몰각한 이들의 탐욕은 그들이 채무자였다는 사실과 무
신경림의 시 「갈대」(1955)에서 갈대는 언젠가부터 자신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그리고는 자기를 흔드는 것이 바람도 달빛도 아닌, 그저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깨닫는데요. 갈대는 왜 밤마다 혼자 울어야만 했을까요? 인간인 저로서는 외롭고 고독했기 때문이라고 감히 추측해 봅니다. 모든 생명체는 독립된 유기체로서 개체의 벽에 갇혀 있기에, 늘 혼자라는 고독과 긴장 속에서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렇기에 인간은 맹렬하게 불연속성에서 벗어나 다른 대상과 연결되기를 원하는데요. 다행히 인간은 축복처럼 불연속성에서 벗어나
정보라는 강렬한 사회의식을 새로운 소설 문법에 담아내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는 작가입니다. 그런 정보라가 이번에는 도서관이 사라진 디스토피아(dystopia, 현대 사회의 부정적인 측면이 극단화한 암울한 미래상)를 그린 『도서관 물귀신』(『대산문화』, 2023년 겨울호)을 발표했습니다. 작가의 출세작 제목이 ‘저주토끼’여서일까요? 이 작품을 읽는 내내 작가의 역할을 비유할 때 자주 사용하는 ‘잠수함 속 토끼’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토끼가 인간보다 산소결핍에 민감하다는 것을 안 수병들은, 혹시라도 발생할지 모를 ‘산소 부족’ 현상을
정영수의 「미래의 조각」(『문학동네』, 2023년 가을호)은 충격적인 사건으로 시작되는군요. 주인공인 ‘나’는 어머니가 고농축 살충제를 먹고 자살을 시도하여 중환자실에 누워 있다는 연락을 받습니다. 평소 자신의 어머니가 “제일의 낙관주의자”라고 여겨왔기에 이러한 소식은 더 충격적일 수밖에 없는데요.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도, 어머니는 낙관주의자로서의 면모를 아낌없이 보여주었을 뿐입니다. 그 당시 뉴스에서는 자율 주행 전기차와 관련된 주식의 계속되는 폭등이 보도되고 있었는데요. 그 뉴스를 보던 어머니는 “조금만 있으면 운전면허도 필요
밧줄에 묶인 코끼리 이야기부터 시작하면 어떨까요? 코끼리는 집채만큼 큰 몸뚱이를 갖게 된 후에도 결코 조련사의 조그만 밧줄에서 벗어날 엄두도 내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유는 조련사가 어린 코끼리를 밧줄에 단단히 묶은 후에, 코끼리가 밧줄에서 벗어나려 할 때마다 모진 채찍질을 가한 결과, 어른이 된 후에도 그 고통의 기억 때문에 감히 조련사의 밧줄에서 벗어날 생각을 못한다는 건데요. 심윤경의 「피아니스트」에 등장하는 수영이 제게는 밧줄에 묶인 코끼리처럼 보입니다. 부유한 부모님을 두고, 미국 뉴욕주 변호사 자격증까지 갖춘 수영은 “깜짝
1980년에 태어나 2002년 「노크하지 않는 집」으로 등단한 김애란만큼 21세기에 많은 주목을 받은 작가도 드물 겁니다. 김애란이 천재적인 재능으로 문학사에 남긴 것들 중에서도, 자기 세대의 청춘들이 겪는 일상에 대한 묘사는 그야말로 발군이었는데요. 그랬던 김애란이 어느새 사십대가 되었듯, 그녀의 소설 속 인물들도 나이가 들어가고 있습니다. 「홈 파티」(『에픽』, 2022년 4월)는 청춘을 통과한 이연과 성민을 통하여 한국사회를 가로지르는 계급의 분열선을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이 때 계급을 나누는 증표는 ‘덕과 인품’이라는데 이
「톰과 제리」라는 유명한 미국의 애니메이션 시리즈가 있습니다. 우둔한 고양이인 톰과 꾀많은 생쥐인 제리가 갖가지 방법으로 대결을 벌이는 이야기인데요. 결론은 항상 작고 날쎈 제리가 힘세고 성깔 있는 톰을 골려 먹고 이겨 먹는다는 것입니다. 이 애니메이션은 아카데미상을 수상하기도 했고, 거의 전세계에 방영되어 수많은 아이들의 사랑을 받아 왔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1980년부터 방영되기 시작하여, 2002년까지 재방이 되었다고 하는데요. 저 역시 어린 시절 이 애니메이션을 빼놓지 않고 챙겨 보고는 했습니다. 이 시리즈에는 늘 인상적인
만약 오스트리아 빈에 가게 된다면, 가장 먼저 프로이트 박물관에 가보겠다고 늘 생각하고는 했습니다. 한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였던 빈의 베르가세 19번지의 2층에 위치한 프로이트 박물관은,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가 나치의 탄압을 피해 1938년 런던으로 이주할 때까지, 무려 40여 년 동안 환자들을 돌보던 사무실이자 집으로 사용했던 곳입니다. 『꿈의 해석』(1899)과 같은 명저가 이곳에서 쓰인 것은 물론이고, 수많은 내담자들이 자신의 심연과도 같은 내면을 임상의 프로이트에게 고백했던 곳이기
부다페스트의 외트베시로란드대학(ELTE)에서 국제학술회의를 마친 연구자 일행은 10월 27일에 체코의 프라하로 학술탐방을 떠났습니다. 삼척동자도 알다시피,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는 프라하에서 나고 살다가 죽은 세계적인 작가입니다. 2023년 가을의 프라하는 카프카로 인해 환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공식적으로 프라하市에서 카프카를 기리는 장소만 무려 33개에 이를 정도였으니까요. 거기에는 프라하의 아버지가 운영하던 옷가게도 있었고, 카프카가 14년이나 근무하던 보헤미아왕국노동자상해보험협회 건물도 있었
지난 10월 24일과 25일에는 헝가리의 명문 외트베시로란드 대학(ELTE)에서 국제학술회의가 열렸습니다. 그 회의에 참석했던 저는 남는 시간을 이용해, 부다페스트 교외에 위치한 루카치 죄르지(Lukács György, 1885-1971)의 묘소를 참배했습니다. 그는 설명이 필요 없는 헝가리 출신의 철학자이자 비평가이며. 정치인이기도 하지요. 저에게 루카치는 그 무엇보다도 『소설의 이론(Die Theorie Des Romans)』(1916)의 저자로 각인되어 있습니다. 어린 저에게 이 책은, 소설이 인류사의 진행과 함께 나아가며,
최근 정신과가 호황이라고 합니다. 코로나 시기를 거치며, 여러 가지 문제로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고 하는데요. 그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호소하는 주된 증상은 우울과 불안이라고 합니다. 우울은 마음이 ‘지나간 과거’에 머물러서, 불안은 마음이 ‘다가올 미래’에 머물러서 생긴다고 하는데요. 사실 인간에게 확실한 과거와 미래란 ‘태어났다는 사실’과 ‘죽는다는 사실’뿐인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출생 이후의 죽음’, ‘성장 이후의 노화’, ‘발생 이후의 소멸’을 의식하지 못한 채 살아가며, 그렇기에 수많은 일들을 저지르고
한때 소설을 평가할 때면, ‘전망(perspective)’이라는 말을 중요시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때 전망이란 현실이 어떤 방향으로 전개되어 나갈 것인가에 대한 가시적인 방향을 가리키는 말이지요. 소설이 단순히 인정세태를 묘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한 사회의 나아갈 방향까지 제시해 주어야 한다는 것인데요. 오늘 소개하려고 하는 이은정의 「다시는 싸우지 않겠다는 말」(『비대칭 인간』, 득수, 2023)은 이러한 전망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어 보이는 작품입니다. 시간제 알바생으로 살아가는 ‘나’는 고향을 떠나 서울의 작은 원룸
세 살배기도 알다시피, 학교는 본래 ‘진리를 배우고 인간성을 기르는 곳’입니다. 그러나 지금 한국의 학교는 안타깝게도 온갖 갈등이 넘치는 곳이 되어 버렸네요. 아수라장이 되어 버린 학교에서는 존경받아야 할 선생님들이 괴롭힘에 시달리다 목숨을 끊고, 평생의 길동무가 되어야 할 학우들이 서로를 향해 폭력을 행사하는 일들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소위 말하는 ‘쎈’ 소재로 독자의 이목을 끌어온 안보윤이 이번에는 학폭(학교폭력)을 소재로 해서 한 편의 작품을 창조해 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다루려고 하는 「애도의 방식」(『문학동네』, 20
여기 ‘요카타’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100세의 할머니가 있습니다. 미역을 찢고 다듬어 식당에 넘겨 살아가는 할머니에게는 서연화라는 이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할머니가 요카타라고 불리는 이유는 “입버릇처럼 말끝마다 ‘요카타(よかった)’라는 말을 덧붙이기 때문”입니다. よかった(요카타)는 ‘다행이다’라는 말로 번역될 수 있는 일본어 단어로서, ‘어떤 일이 잘 풀려 안심이 될 때’ 사용하곤 하지요. 그러나 실제 할머니의 삶은 ‘요카타’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머네요. 이 할머니는 지금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돈이나 명예나 권력 같
권여선의 「사슴벌레식 문답」(『각각의 계절』, 문학동네, 2023)은 ‘든’이라는 한 글자만으로도 소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작품입니다. 「사슴벌레식 문답」에는 30년을 격한 두 가지 시간층이 존재합니다. 30년 전, 서술자인 준희를 포함한 부영, 경애, 정원은 세상에 둘도 없는 단짝 친구들이었습니다. 대학교 신입생 시절 같은 하숙집에서 생활한 넷은 늘 함께 어울리고는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30년이 지난 지금, 넷은 말 그대로 남이 되어 버렸습니다. 정원은 20년 전 자살로 이승을 떠났으며, 경애와 부영은 원수보다도 못
지난 7월 27일은 6.25가 멈춘지 70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수백만의 사상자가 발생한 6.25만큼 우리 민족에게 큰 상처를 준 사건도 드물텐데요. 상처와 고통에 누구보다 민감한 작가들답게, 지난 세기 한국 작가들이 가장 많이 다룬 제재는 바로 한국전쟁과 분단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전상국처럼 6.25 전쟁을 지속적으로 파고든 작가는 드뭅니다. 흔히 6.25소설은 세대를 기준으로, 크게 '체험 세대', '유년기 체험 세대', '미체험 세대'의 작품들로 분류되고는 하는데요, 1940년에 출생한 전상국은 유년기 체험 세대를 대표하는
윤이형의 「고스트」(『릿터』, 2019·12,2020·1)는 문학이 결코 사라져 가는 낡은 예술 양식이 아님을 깨우쳐 주는 소설입니다. 이 작품은 한국 문단의 중심적 테마라고 할 수 있는 가부장의 폭력이나 여성 혐오와 같은 심각한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다양한 테마와 기법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작가답게 이번에는 SF적인 요소를 능수능란하게 활용하여, 읽는 재미와 함께 진지한 사유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네요. 윤이형은 누가 뭐래도 한국 문단의 보배와도 같은 작가임에 분명합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 정애령은 소위 잘나가는 40대 중반의
인간이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고 타인을 위해 거리로 나서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역사나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 때문일까요? 타인을 향한 뜨거운 연민과 사랑 때문일까요? 오늘 이야기하려고 하는 김도일의 「어룡이 놀던 자리」(『어룡이 놀던 자리』, 득수, 2023)는 부끄러움과 죄의식이 살아가는 힘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때로 이기적인 인간을 역사의 현장에 머물게 하는 힘이 될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소설입니다. 1980년대가 배경인 이 작품은 민주화 투사인 요한이 감옥에 갇혀 신부님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돼 있습니다. 요한은 이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