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실은 한국 근대 음악교육의 요람이었다. 근대 음악 발전의 선구적 역할을 한 현제명, 김동진, 박태준, 박경호 등은 숭실 음악교육의 뿌리에서 성장하여 당대를 대표하는 음악가로 명성을 떨쳤다. 한국 근대 음악의 기원은 교회의 찬송가에서 비롯되었고, 기독교계 학교는 음악을 정식 과목으로 가르치고 창가를 도입하여 근대 음악 발전의 동력이 되었다. 숭실은 창립 이듬해인 1898년부터 음악을 정식 교과목으로 편성하였고 오르간, 바이올린 등 양악기 연주도 가르쳤다. 1913년 숭실대학 교수로 재직하던 모의리(E. M. Mowry, 牟義理)와 그의 아내가 합창단을 결성하고 음악회를 개최했다. 이와 함께 음악대도 출범했다. 교원과 학생 20여 명으로 결성된 음악대는 전국을 돌며 음악회를 개
1928년 4월 20일, 문과 중심의 숭실이 부속교육기관으로 농과강습소를 개설했다. 농업 인구가 전체 국민의 90%에 달했던 때였다. 숭실은 일찍부터 문과 중심의 기독교적 심성을 가진 인재 양성에 주력하였고 이과와 실업과를 개설하여 근대사회에서 요구되는 인재 양성에도 힘썼다. 농과강습소 개설은 실용 교육의 구체적인 발현이었다. 당시 관공립의 농업학교는 기술적인 관리 양성을 목표로 삼고 있었던 데 반해, 숭실은 농업 기술자이면서 농촌을 실질적으로 이끌어갈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한 목표로 농과강습소를 부설한 것이다. 숭실은 농과강습소가 상당한 진전을 보임에 따라 1931년 2월 28일 정식 농학과로 승격시키기 위해 총독부에 인가원을 제출하였다. 일주일 후 조선총독부 고시 제 207호로 숭실전문학교
1928년 10월 15일 맑은 가을하늘의 아침, 평양에서 출발한 열차가 신촌역에 서자 플랫폼에 정렬한 연희전문학교 악대가 숭실 교가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경성역으로 오는 대규모의 숭실 군단을 환영하기 위한 이른 아침의 행사였다. 매퀸 교장은 수학여행을 겸해서 숭실전문학교 학생들을 이끌고 경성역에 도착, 당당한 보무를 내딛었다. 관철동에 있는 신행여관에서 여장을 푼 숭실 학생들은 다음날의 일전에 대비해 몸을 만들었다. 10월 16일과 17일에 걸쳐 한국 스포츠 역사의 신기원이 된 숭실전문과 연희전문간의 대교(對校) 경기가 치러졌다. 당대 조선을 대표하는 학교 간의 애교심 함양, 친선교류를 목적으로 운동경기가 치러진 것이다. 미국의 하버드대학과 예일대학 간의 미식축구, 영국 옥스퍼
1928년 4월의 어느날 이른 아침, 약관 25세의 젊디 젊은 교수가 평양역에 도착했다. 일본 유학을 마치자마자 귀국한 이 젊은이는 긴장한 모습을 애써 감추며 검은 뿔테 안경 너머로 마중 나온 학생들의 눈을 맞바라보았다. 바로 숭실대학 문학 담당 교수로 부임하는 양주동이다.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영문학과 졸업과 동시에 문단에서의 명성에 힘입어 선배의 추천으로 숭실대학에 부임한 것이다. 양주동은 숭실대학 교수 추천을 받았을 때 몇 가지 걱정거리를 안고 있었다. 신앙 문제와 술, 담배 문제가 그것이다. 아직 젊은 객기와 허세로 밤낮 시를 읊조리며 연애를 동경하고 도쿄에서 ‘주당의 거물’로 소문난 그에게 술, 담배를 일절 엄금하고 계율이 엄중하기로 소문난 장로교단 경영의 학교로 부임하는 것은 마음에
1905년 서울 배재고보 운동장에 소나무 기둥을 깎은 골대가 세워졌다. 그리고 축구경기를 갖기 시작했다. 공식적인 축구대회는 1921년 조선체육회와 평양기독청년회가 각각 주관하여 개최한 전조선축구대회가 처음이다. 첫 대회는 경기규칙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던 터라 대진표 없이 제비뽑기로 상대팀을 가렸고 심판의 경기운영에도 미숙함이 많았다. 조선체육회 주최 청년단 준결승전 숭실구락부와 배재구락부의 경기는 심판 판정 시비로 양 진영의 편싸움이 일어나 결국 우승팀을 가리지 못했고, 평양기독청년회 주최 청년단 준결승전 숭실대학과 천도교청년회의 경기 역시 심판에 대한 거친 항의와 분쟁이 일어 경기가 중단되고 말았다. 숭실대학이 전국대회에서 거둔 첫 우승은 1923년 평양기독청년회 주최 제3회 전조선축구대
1929년 11월 시작된 광주학생항일운동은 이듬해 3월까지 전국으로 확대되어 5만명이 넘는 학생들이참여한 대규모의 항일운동이다. 학생들은 ‘일본 제국주의 타도’ ,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거리로 나섰다. 숭실대학의 재학생 역시 학생운동에 참여하여 평양 지역의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1929년 12월 14일 시험에 불응하고 백지 답안을 제출하며 동맹휴교에 돌입하였고 곧이어 4학년을 중심으로 궐기하였다. 1930년 1월 12일에는 평양 각 학교의 재학생 1,600여명이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고 이어서 1월 21일 숭실대학을 필두로 시내 12개 학교가 만세를 부르면서 가두 행진을 전개하였다. 평남 학무국에서는 이들 학교에 휴교령을 내리고 학교와 시내 각처에 경관을 배치하여 학생들
성경, 한문, 이과, 수학, 국어. 1912학년도 숭실대학 입학시험 과목이다. 입학 자격은 중등 과정의 학교 졸업자 가운데 18세 이상 세례교인으로 품행이 단정한 자로 한정했으며, 특히 교회와 목사의 확인서 제출은 필수였다. 이처럼 까다로운 조건에도 불구하고 경쟁률은 2대 1을 상회했다. 이들 입학생 가운데 졸업의 영예를 얻는 자는 절반에도 크게 못 미쳤다. 1926년 엄격한 선발과정을 통과한 입학생 70명 가운데 졸업자는 19명에 불과했다. 가정형편 때문에 또는 학업수준이 미치지 못해 중도에 탈락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주요인은 엄격한 학사관리에 있었다. 숭실대학의 엄격하고도 철저한 교육방침은 졸업의 관문을 통과해야 하는 학생들에게는 혹독함 그 자체였다. 19
1908년 6월, 숭실은 한국 최초로 대학 졸업생 2명을 배출했다. 서양의 오랜 대학 역사와 수만 명의 졸업생 배출과 비교하면 보잘것없는 일이다. 하지만 넘치는 부자에게는 금은보화가 특별히 귀할 것 없지만 배고픈 백성에게 한 벌의 옷과 한 그릇의 죽은 고맙고 감사하기 그지없는 법이듯이, 신학문 수용이 늦어지고 문명개화가 지연되며 외세의 침탈로 국권이 유린당하는 상황에서 정규 대학교육 출범 및 졸업생 배출은 당대 암울했던 시대를 비추는 횃불이요 국가의 자주부강의 첩경으로 인식되었다. 숭실대학 초기 졸업식은 지금과 달리 매우 특별하게 진행됐다. 매년 6월이면 평양성 내는 대학 졸업장을 앞세운 행렬로 시끌벅적했다. 졸업식 첫날이면 학사복에 사각모를 쓴 졸업반 학생들이 인력거를 타고
평양 숭실의 학생들은 특별한 방학을 보냈다. 방학 때마다 재학생들이 학생전도대를 조직하고 자비를 들여 국내는 물론 만주지역까지 순회하며 전도활동을 실시했던 것이다. 1900년 처음 조직된 전도대의 활동은 숭실이 폐교되기 직전 해인 1937년까지 자발적이고 지속적이며 조직적으로 전개되었다. 전도대는 강연을 담당하는 학생들과 주악(奏樂)을 담당하는 학생들로 구성되었고 짧게는 2주에서 길게는 4주간 전국을 순회하며 전도 집회를 열었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동시에 수준 높은 강연회 및 음악회를 개최함으로써 가는 곳마다 지역민들의 큰 관심과 환영을 받았다. 특히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강연회는 사람들의 마음을 뜨겁게 하기에 충분했다. 한편 조선총독부에 의해 ‘불령선인(不逞
체조와 뜀박질을 상스럽게 여기던 시절이었다. 고종은 1895년 갑오개혁 당시 반포한 교육입국조서에서 인재양성 및 국가부강의 요체로 지(智)․덕(德)․체(體)를 내세웠고, 이때부터 근대 체육교육이 시작됐다. 한편, 선교사들은 일찍부터 각종 스포츠를 도입하여 보급했고 이와 함께 기독교계 학교에서는 체조를 교과목으로 채택하여 근대 체육의 저변을 확대해갔다. 숭실도 일찍부터 체조 교육을 실시했다. 1901년 정규교육과정에 체조를 포함하여 매주 진행했는데, 담당교사는 블레어(W. N. Blair) 선교사였다. 여기에서의 체조는 체육 일반을 교과목적으로 지칭하는 용어이다. 대한제국기의 근대 체육은 기독교계 학교를 중심으로 한 교과목 채택과 더불어 학교운동회와 학교 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