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극인이란 웃음을 주는 사람들이다. 이는 간단하고 명료하다. 하지만 희극인들의 역할과 모습이 명료하다고 해서 희극인들이 사람들에게 주는 ‘웃음의 의미’까지 간단한 것은 아니다. 현재 코미디언이라 불리며 공연과 방송 등에서 활약하고 있는 희극인들은 오랫동안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역할을 하던 이들이다. 옛 우리 사회에는 ‘광대’라는 이름으로, 과거 서양 사회에서는 또 다른 이름으로 불리며 사람들에게 재미와 행복감을 줬다. 강조하고 싶은 점은 그들의 역사가 짧지 않다는 점이다. 그들이 웃음을 주던 일들이 모두 단순한 상술이었다면 희극인이라
본교생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주고 받을 수 있는 대학생 커뮤니티인 ‘에브리타임’을 보면 현 정부에 대한 비판의 글이 호응을 얻고 있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비판 글들을 자세히 보면 본교의 미래와 더 나아가 우리 사회의 미래가 다소 걱정되기도 한다. 정부를 비판하는 자세에 딴지 걸고 넘어지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개개인의 이념과 철학을 무시할 생각은 없다. 다만 그 비판이 다소 무분별하다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고 싶다. 게시글에 비판만 있을 뿐 그 비판의 내용과 근거가 매우 부실하거나 없는 수준이다. ‘대깨문(머리가
가짜뉴스의 파급력에 대해서는 누구나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최근의 네트워크 환경은 ‘편리한’ 정도를 넘어 ‘위험한’ 수준까지 치닫는다. 요즘의 네트워크는 개개인에게 지나치게 가깝기에 그 속에서 왈가왈부 되는 것들의 사실 여부에 대한 판단을 흐린다. 이것이 사회적으로 어떤 문제를 야기하는지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 듯하다. 그러한 ‘문제’를 논하는 것을 넘어 우리 사회가 그 문제에 대해 ‘대처’하는 방법을 논하고 싶다. 우리는 가짜뉴스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정부에 의한 ‘규제’라는 방식을 택했다. 가짜뉴스 생산 가
모피 금지 운동이나 채식주의자 관련 상품 증가 등의 동물 보호 이슈들을 보면 잠깐 따듯한 마음이 들다가도 인간의 이중성을 성찰하게 된다. 그렇게 동물을 ‘보호’하자는 태도가 마치 그들의 행복을 인간의 손으로 좌우할 수 있다는 게 전제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동물의 가죽을 이용하는 것도, 사육하는 것도, 먹는 것도, 보호하는 것도 모두 인간의 마음이라면 그들의 주체성과 권리는 사실상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동물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비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비건 패션’을 추구하는 취지는 좋지만 과연 그것만으로 동물들의 권리
법은 정의를 지향하지 않는다. 다만 합의를 지향할 뿐이다. 최근의 심신미약 판결에 의한 형벌 감형 이슈를 보면 드는 생각이다. 그렇게 법이 합의를 지향하는 이유는 국가의 본질에 맞닿아 있다. 국가는 존재가 아니다. 국가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합의이자 우리가 함께 살아남기 위한 수단이다. 인간 개개인의 힘은 온갖 자연물에 비해 미약하기에 우리는 함께 살아남고자 집단화됐고, 그 집단이 거대화하면서 국가가 됐다. 즉, 국가의 존재가 우선이 아니라 인간이 우선이다. 이때 수많은 인간이 모여 살게 됐으므로 개개인은 스스로의 권리나 주관만을
가정마저 폭력의 공간이라면 이 세상에서 안전한 곳은 없다. 이런 말을 듣는다면 이에 가장 공감되는 이는 누구일까? 폭력적인 가정에서 유년 및 소년기를 보낸 이들일 거란 생각이 든다. 가정은 우리들에게 ‘1차 집단’이라 규정될 정도로 기본적인 공간이며, 안식처이기에 그곳에서의 폭력은 모든 사람들에게 더욱 견디기 힘들고 괴로운 것이겠지만 특히 스스로 안식할 곳을 찾을 수 없어 가정에 돌아가야만 하는 어린 아이들에게 더욱 치명적이다. 특히 가정 내에서 어린 아이들에게 가해지는 학대는 자칫 ‘훈육’이라 여겨질 수 있기 때문에 이를 학대라고
홈족이 늘고 있다. 집에서 굳이 어딘가로 나가지 않고 많은 일들을 해낼 수 있을 만큼 기술이 발전했기에 그러한 이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공상과학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제자리에서 대부분의 여가생활을 즐기고 식사를 하고 잠을 잘 수도 있는 미래의 모습이 보인다. 홈족은 단순히 트렌드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미래 인간의 표준적인 형태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은 긍정적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늘어난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들의 운동량이 줄어든다는 것이며, 동시에 사람들 간의 교류도 줄어든다는 것
지난 1일(월) 세계적인 건축가 스티븐 홀이 본교에 방문했다. 스티븐 홀 교수는 그의 건축 사상이나 그가 남긴 건축물들을 소개하며 본교생 및 강연 참여자들에게 깊이 있는 수업을 전하고 갔다. 당시 그가 말한 핵심 개념 중 하나가 건축물의 사회적 영향력이다. 건축물은 사회 구성원을 하나로 모으고 지역 사회에 영향력을 끼치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강연을 가장 가까이에서 들었던 우리는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본교와 본교 캠퍼스가 얼마나 사회적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지 말이다. 우선 본교 캠퍼스는 꽤나 지역 사회를 하나로 모으
가끔 본교생들은 본교 주변, 즉 상도동의 상권이 좋지 못하다며 불만을 표하곤 한다. 이는 본교 커뮤니티인 에브리타임에 종종 올라오는 불만이며 지인과 이야기할 때에도 자주 논하는 이슈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불만을 표하기 전에 본교생들이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것은 상도동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시설은 본교이며, 상도동 인근에서는 본교 캠퍼스의 유동인구가 가장 많을 것이란 사실이다. 수요가 있어야만 공급이 있다. 굳이 경제학을 전공하지 않더라도 상식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법칙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식을 바탕으로 본교 주변의 상
최근 여성들 사이에서 가장 주목되는 주제 중 하나가 탈코르셋 운동이다.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여성들뿐만이 아니다. 이를 특별히 지지하지 않더라도 최근 미디어에서 조명하는 여성성 강요나 억압 등을 직간접적으로 접한 사람들 역시 탈코르셋 운동에 적잖은 관심을 보이는 듯하다. 이처럼 성평등 운동에 관심이 늘어나는 것은 사회적으로 고무적인 일임에도 최근에는 부차적인 문제들도 보인다.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이들 사이에서 서로 간의 비난이 오고 가는 일이다. 특히 이번 탈코르셋 관련 이슈가 관심을 모았을 때, 그러한 의견 차이가 굉장히 분명하게
우리 사회는 좋은 것을 합의하며 살아가지 않는다. 좋다고 합의한 것을 짊어지며 살아간다. 어휘는 비슷하면서도 꽤 큰 차이가 있는 말이다. 결국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것이 ‘좋은 것’이냐 혹은 ‘합의된 것’이냐의 차이가 있으니 말이다. 특히 국민적으로 논의되는 것이 소수자에 관한 일들일 때 그러한 차이에 대해 통감하게 된다. ‘합의’라는 것은 우리 사회를 이루는 가장 큰 원칙인 민주주의의 강점이지만 한편으로 염증이다. 사회를 움직이는 대의에 자신의 의견을 행사할 수 있지만 자신의 의견이 반영된 일이기에 그 대의의 결과가 어떻든 고스
곧 지방선거가 찾아온다. 본교생들을 비롯한 수많은 서울시민들이 최근 공약을 발표하거나 선거 유세를 펼치는 후보들에게 주목하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지난 선거들에 비해 후보들의 공약에 청년에 관한 얘기가 자주 언급된다. 이는 많은 정치인들이 언급한 것처럼 지난 촛불혁명의 참여에 청년들이 앞장선 것이 영향을 줬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직 정치인들이 청년들을 대하는 유권자로서의 대우에 안주할 때는 아니다. 그들의 많은 청년 공약들이 취업 얘기에 국한돼 있기 때문이다. 우리 청년들은 취업하고 돈 버는 기계가 아니며, 지금 사회에서 활동하고
우리는 조금 더 성숙해질 필요가 있다. 본지는 성차별 및 성 소수자에 관한 이슈들을 보도하곤 한다. 하지만 매번 느껴지는 것은 기사 전개에서의 망설임이다. 과연 우리가 성차별을 기사 내의 단정적인 문장으로 표현해도 독자들에게 어색함 없이 전달될지 고민이 된다. 이는 성차별과 성 소수자 등에 관한 이슈가 사회적으로 합의되지 않은 의견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장애인에 관한 보도를 예로 들자. 장애인에 대한 차별과 폭력에 관한 보도는 거의 모든 이들에게 분노를 자아내고, 독자들로 하여금 그들에 대한 복지의 필요성을 느끼게 한다. 심지어
본교는 왜 사회적 약자 보호에 우선하지 않는가? 기독교에 접해오며 본교에 관해 들던 가장 큰 의문 중 하나다. 숭실은 반문할 여지없이 기독교 정신을 뿌리에 두고 있다. 그럼에도 앞서 말했던 부분에 대해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아 아쉬울 때가 많다. 물론 본교는 봉사와 복지에 관해 굉장히 관심이 많은 대학 중 하나다. 얼마 전엔 장애인 복지 관련 사업에서 최우수 성적을 받기도 했으며 교내의 직원들에겐 육아와 휴가 복지를 만족할 만한 수준으로 제공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부족한 부분이 없다고 말하기 어렵다.
학보사 기자 생활을 하며 가장 많이 느끼는 점은 대부분의 비판 기사나 사설이 그저 ‘비판을 위한 비판’에 머문다는 점이다. 즉 어떤 사안의 단점이나 맹점을 논해봤자 개선되는 모습이 매우 드물다는 이야기다. 이는 어쩌면 기자로서 한심하게 보일 수 있는 푸념이다. 그럼에도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본지의 비판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본부 측도 잘못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다름 아닌 공간 부족에 관한 문제이며, 특히 학습 공간의 부족 문제이다. 본교 캠퍼스는 실제로 넓은 축에 끼지 못한다. 이를 비판하자면 사실 본부 입장에서도 억울할 수 있다
꽃샘추위도 물러나고 본격적으로 꽃놀이를 즐길 수 있는 시기가 됐다. 일부 학생들은 곧 찾아올 중간고사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밖으로 나갈 엄두를 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혹시 나들이를 가게 된다면 공공장소 내에서의 기본적인 예의는 지켜야 할 것이다. 더불어 예의 이상으로 지켜야만 하는 것들 역시 존재한다. 꽃이 화려하게 곳곳을 장식하는 만큼 꽃놀이 명소에도 인파가 몰리기 마련이다. 그중 대개는 물론 여타 방문객과 다투지 않고 본인들의 쓰레기를 잘 치우는 등의 공공 예절을 훌륭히 실천한다. 그럼에도 매번 봄만 되면 꽃놀이 방문객
청년들뿐만 아니라 장년층에게도 술기운을 빌려 연애를 시도해보는 일은 낯설지 않을 것 같다. 그럼에도 최근 ‘연애를 위한’ 주점의 시장 규모가 커지고 있는 것은 과연 바람직한지 재고해야 한다. 우린 제정신으로 가장 기본적인 욕망조차 채울 수 없는 사회에서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대학생들을 비롯한 청년들에게 클럽이나 헌팅주점 등의 사교적 공간은 매우 익숙하다. 홍익대학교나 건국대학교 등의 대학가 인근에도 그러한 술집이 다수 위치해 있으며, 항상 그 유흥가의 주변은 인파가 흘러넘친다는 점에서 주점의 시장 규모는 작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때 주목해야 할 점은 넘치는 인파 속에 거의 모든 청년들이 한 번쯤은 합류해봤다는 것이다. 물론 술을 마시기 위해서나 마음 편히 놀기 위해서일 수도 있지만 그 중 많
봄바람은 종종 우리를 연애로 이끌며 봄은 종종 연애와 만남의 계절로 비유되곤 한다. 긴 겨울을 지나 간만에 맞이한 따스한 바람이, 그보다 더 따뜻한 사람의 살결을 원하게 하는 탓인지도 모른다. 특히 인생 전반에서 가장 활력 있는 청년기에 접한 대학생들은 연애를 더욱 필요로 하게 된다. 단지 그럼에도 매사에 그렇듯 무언가를 얻고자 한다면 스스로를 갈고 닦는 노력이 필요하다. 연애를 하는 것은 여타 동물들과 인간을 구별하는 하나의 특징으로 여길 정도로 특별한 문화이며, 동시에 성 정체성에 큰 관계없이 보편적인 일이다. 이에 우리 생활 속의 당연한 일상 중 하나로 치부되기도 한다.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수많은 연애 경험담이나 연애 중인 지인들이 연애라는 하나의 행복과 가치를 무디게 만드는 것이다.
문화는 빠른 속도로 발전하는데 우리는 어떠한가? 과연 우리는 우리 사회가 스스로를 위해 가꾸고 발전시키는 문화와 어우러질 준비가 됐느냐는 질문이다. 유행하던 각종 콘텐츠가 얼마 지나지 않아 급변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단 점에서 앞선 의문을 항상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한다. 아마 우리 사회는 문화를 부리기는커녕 뒤따라가지도 못하고 있는 듯하다. 당장 소년층을 넘어 청장년층의 마음까지 사로잡은 웹 콘텐츠 시장의 단면을 조금만 들여다보아도 그렇게 생각할 법하다. 웹 작가들의 작품을 보호할 저작권 제도가 미흡할뿐더러 소비자들 역시 그들의 권리에 큰 관심이 없어 보인다. 심지어 일부 플랫폼에 소속된 작가들은 인기를 척도 삼아 노동에 상응하는 적절한 경제적 대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들은 웹 시
어떤 이유에서건 본교의 구성원이 덜 됐구나. 청소노동자들의 생활을 밀착 취재하던 이번 주 내내 그런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다른 무엇보다도 인식의 차원에서 그러하다. 우선 본교의 구성원들 중 학생, 교수, 직원들과 마찬가지로 청소노동자들 역시 숭실의 이름을 빛내는 것에 기여하는 하나의 구성원이라고 여기는 이는 얼마나 있을까? 특히 학생들 중 대부분은 청소노동자와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을 꺼릴 만큼 그들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다. 청소노동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같은 벤치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빤히 쳐다보거나 옆에 다가오는 것을 꺼려하는 학생들이 다수 있는 듯했다. 만약 학생이나 교수가 옆에 앉았더라도 그러한 거부의 행동을 취했을지 의문이다. 심지어 직원들 역시 학생들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