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은 악한 권력의 상징인 절대 반지를 둘러싼 투쟁 이야기다. 이 이야기 속에서 다양한 인물들이 반지의 위력과 마주한다. 간달프, 아라코른, 갈라드리엘처럼, 반지의 달콤한 유혹을 이겨내는 고귀한 존재들이 있다. 고귀한 자의 손에 있다고, 악이 선이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더 큰 악이 될 뿐이다. 끝내 타락한 사루만과 달리, 이들은 이런 악의 본질을 통찰했고, 또 자신의 한계도 잘 알았다. 반면 반지를 갈망하는 이도 있다. 권력을 탐내는 사우론과 사루만, 반지에 사로잡힌 골룸만 그런 것이 아니다. 선한 이에게도 힘은 절실하다. 사
이 책은 해방 이전부터 ‘삼순이’라는 이름으로 호명되어온 한국 여성 노동자의 궤적을 좇는다. 여기서 칭하는 ‘삼순이’는 식민지 시기를 전후로 노동 시장에 대거 진출했던 여성 ‘식모’와 ‘버스 안내양’, 그리고 ‘여공’을 뜻한다. 정치외교학자인 저자 정찬일은 오늘날의 시점에서 다소 멀게만 느껴질 수 있는 이들 여성 노동자의 이야기를 당대 신문 기사나 잡지, 르포 또는 문학 작품 등의 다양한 사료들을 통해 흥미롭게 재구성해낸다. 이 책에 담긴 여성 노동자에 대한 다양한 역사적 기억들은 마치 본인의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는 것처
2020년의 팬데믹 이후 교육분야에서는 ‘EduTech(에듀테크)’라는 용어가 대유행어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이 용어를 1980년대 후반 미국 유학을 준비하면서 미국 대학의 학과이름에서 처음으로 접했다. 그리고 1990년 석사과정을 시작하면서 첫 번째로 수강한 교과목명이 『Introduction to Educational Technology(ET)』였고, 주교재가 사진으로 보고 있는
존 스튜어트 밀의 은 고전이다. 숭실대학교 학생이라면 누군들 이 책과 저자의 이름을 들어보지 않은 이가 없을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우연히 읽었다. 40살이 넘어 유교철학(儒敎哲學) 전반을 다룬 교양강좌 중에 자유에 대한 논의를 조금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을 읽게 된 인연이다. 내 독서습관은 전공서적이라면 난이도와 두께를 불문하지만, 그 외 교양으로 읽는 책은 가능하면 가독성이 좋고 분량이 많지 않은 것을 선호한다. 책세상에서 고전의세계 시리즈로 나온 은 딱 안성맞춤이었다. 나중에 수준
아브라함 죠슈아 헤셸(Abraham Joshua Heschel) (1907-1972)은 20세기 가장 위대한 유대교 신학자 중 한 사람이다. 헤셸에 따르면 히브리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열정에 공감한 하나님의 심부름꾼으로서 역사 속에 공평과 정의를 펼치려는 하나님의 정념(파토스)의 화신들이다. 을 통해 여러 차례 헤셸은 히브리 예언자들의 가르침이 사회 정의를 촉구하는 기폭제라고 주장하였다. 은 귀납적 구조로 되어 있다. 1부는 구체적인 예언자들의 면모를 자세히 귀납적으로 고찰하고 2부는 이 귀납적인 발견물들을 바탕
한때, ‘호모사피엔스’ 또는 ‘경제적 동물’로 비유되기도 했던 ‘일본인은 경제에 대해 어떤 정신적인 신념과 이념을 소유하고 있는 것일까?’라는 담론은 한국인은 물론, 전 세계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의 관심사였다. 필자는 평소에 한국과 가장 인접해 있는 일본이라는 나라가 오늘날 자타가 공인하는 경제 대국이 된 비결은 과연 무엇일까? 일본인은 한국인과 같은 동양인인데, 과연 비범하고 특별한 존재일까? 한국인과 일본인의 궁극적인 차이점은 도대체 무엇일까? 등 지극히 평범하고 일반적인 궁금증을 푸는 실마리를 찾고자 오랜 기간에 걸쳐 전
허수경 시인은 경남 진주에서 태어나, 독일 뮌스터에서 사망했다. 이 책의 초록빛 띠지를 걷어내니 장정 전체를 단일하게 물들인 감색이 아름답게 다가왔다. 제목의 글씨는 시카고 타이프라이터 폰트 느낌으로 처리되어 있다. 제목 밑에는 세로 행으로 ‘허수경 유고 산문’이라는 글씨가 흐릿한 보랏빛으로 심어져 있다. 가로 행만큼, 세로 행으로도 쓸 수 있는 한글이 어느 제삿날의 위패처럼 단아하다. 장정은 머메이드(mermaid) 종이류를 사용했다. 종이 질감이 인어의 비늘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두껍게 처리된 머메이드 종이는 빛을
2010년 이후 급등한 부동산 가격, 취업난과 비정규직의 증대를 비롯한 고용의 불안정 문제는 한국 사회에서 임금 및 자산의 불평등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증대시켰다. 불평등 상황에 대한 이러한 우려는 특히 한 세대의 자원이 다음 세대로 옮겨가는 계급 재생산의 문제와 맞물려 수저계급론에 대한 대중적 공감이 커지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한국사회의 불평등 문제는 실제로 심각한 수준인가? 또 그것은 과거에 비해 오늘날 더욱 심화되었는가?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이러한 불평등은 어디에서 기원한 것일까? 사회학자 이철승의 노작
“오늘날 세계 모든 저소득 국가에서 초등학교를 나온 여성은 얼마나 될까?” 객관식 문제이다. [①20% ②40% ③60%]의 세 보기에서 선택하면 된다. 이 책은 위와 같은 3지선다 13문항의 질문으로 시작한다. 이 질문들의 평균 정답률은 16%이다. 찍어도 33%가 나올 수 있는 3지선다 문제라는 점을 감안했을 때 심각한 수준이다. 인간은 주관적이다. 최대한 합리적이고 객관적으로 판단하려해도 결국 주관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나 정도면 객관적인 사람이지’라고 자부하고 있다. 나 역시도 그러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
동서양 비교철학을 오랫동안 연구하고 있는 양승권 교수의 “니체와 장자는 이렇게 말했다”를 만났다. 장자와 니체를 하나의 틀에 놓고 비교하기란 그리 쉬운 작업이 아니다. 무릇 진리는 비교를 통해 탐구해야 한다는 말이 있듯이, 동서양을 관통하는 철학의 세계는 우리에게 늘 어렵게 다가온다. Covid-19 팬데믹은 우리의 일상을 송두리째 변화시켜,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하고 있다. 만남으로 시작되는 대면의 세상에서 디지털을 통한 비대면이 일상화되고 있다. 세상의 공간이 좁아지듯이 문화와 문화 사이 사고의 벽도 낮아지고 있을까. 보이지 않
사회생활을 하는 성인들이 많이 하는 고민 중의 하나가 바로 인간관계에 관한 것이다. 필자 또한 사람을 사귀는 데 그 폭이 너무 좁은 것은 아닌지 스스로 고민하던 차에 이 책을 만났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지만 기대했던 것보다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던 책이었다. 저자는 실리콘밸리와 스탠퍼드에서 발견한 좁고 깊은 인간관계의 힘에 대해 강조하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만 만나도 일과 인생이 성공하는 인간관계의 법칙에 대해 말하고 있다. 옥스퍼드대학교 진화인류학과 교수인 로빈 던바(Robin Dunbar)는 ‘던바의 수’라는 인간관
20세기에 들어서며 물리적인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을 근본부터 바꿔 놓은 두 가지가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이다. 상대성이론은 20세기 초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라는 천재 한 사람의 깊은 통찰의 결과물이다. 조금 복잡한 수학이 필요하지만 여전히 고전역학의 영역이고 그 시작과 끝이 명확하다. 이를 통해 우리는 시간이 절대적이지 않으며, 움직이는 사람의 시간은 정지해 있는 사람의 시간보다 느리게 흐르고, 낮은 지대에 사는 사람의 시간은 높은 지대에 사람의 시간보다 느리게 흐른다는 등의 재미있는 결과를 얻는다. 많은 소설과 영화의 소재로 쓰여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제2차 세계대전 중 400만 명 이상의 유대인이 학살당한 최대 규모의 강제 수용소다. 이 책의 저자인 프리모 레비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로, 수용소에서 벗어나 집으로 돌아오자 마자 자신이 목격한 일들을 글로 옮기기 시작했다. 이 책을 읽은 많은 이들은 프리모 레비에게 어떻게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물었다. 그는 수용소의 굴욕과 부도덕한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인간으로 살아남겠다는 의지와 자신이 경험한 일을 수용소 바깥의 사람들에게 전달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생존의 원동력이었다고
하루 14시간이 넘는 회사 일에 매몰된 채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평범한 직장인 닉 코민스키. 어느 날 그는 “나사렛 예수와의 만찬에 초대합니다”라는 내용이 담긴 한 장의 초대장을 받았다. 친구들의 장난일 것이라 생각하면서 초대받은 식당으로 간 닉은 그곳에서 자신이 예수라고 말하는 어떤 남자와 마주하게 된다. 그 남자는 자신이 예수임을 믿지 않는 닉에게 “불신을 중단하고 자신이 진짜 예수인 것처럼 대화를 해 보자”고 제안한다. 그 남자의 제안을 받아들인 닉은 “누구도 나[예수]를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하나님]께로 갈 수 없다”는 성경
이 우주는 어디서 왔을까? 이 세계는 정말 존재하는 것일까?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이런 질문은 철학의 것이었고 지금도 그렇기는 하다. 그런데 그 호기심을 해결해보려고 개념과 논증의 잔치에 맞닥뜨리고 나서 사람들은 철학에서 멀어져 간다. 같은 질문을 천체물리학에서도 한다. 자신과 이 세계에 호기심을 가진 사람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가장 먼 것을 바라본다. 별이다. 개념의 잔치가 아니라 육안으로 관찰할 수도 있는 것을 직접 설명하는 방식은 지적 호기심을 해소해주는 통렬함을 안겨준다. 이것이 같은 질문에 대해서 이쪽 방법을 더 좋아
이 책의 제목인 P31(Proverb 31)은 성경의 잠언서 31장에서 비롯됐다. 이 책은 신실한 기독교인이자 세계적 인 건축설계회사 팀하스의 CEO인 저자가 잠언 31장을 인용해 비즈니스와 인생의 지혜를 전하고 있다. 이 책은 크게 4개 파트로 구성되어 있어 저자의 삶과 비즈니스의 과거, 현재, 미래의 관점에서 서술하고 있다. 먼저 파트 1과 2는 과거 관점에서 저자인 하형록 회장의 자서전적인 내용과 20년이 넘는 기업경영에서 성공을 거둔 비결을 소개하고 있다. 파트 3에서는 현재 관점에서 저자가 일했던 기존의 단순 주차장을 문화
16세기 말에서 17세기로 넘어오면서 조선은 가장 혹독한 내우외환에 시달리며 낯선 경험을 한다. 17세기 중반 중국의 지배세력이 한족(漢族)에서 만주족(滿洲族)으로 교체되면서 겪게 된 낯섦이다. 조선의 지식인들에게는 이 때문에 더 이상 중국은 없다는 의식이 생긴다. 이제 조선 지식인의 의식 속에 상상 속의 중국과 현실의 중국이 자리 잡았다. 또한 이 시기의 조선 지식인들은 서양과의 만남이라는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한 낯섦에 노출이 되기 시작한다. 이런 낯섦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 연행록이다. 청조가 안정되면서 조선 지식인들은 사절
『변신』이라는 작품으로 널리 알려진 작가 프란츠 카프카, 그러나 그의 작품들 중에서 내가 가장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단편 「법 앞에서」이다. 우화라고도 할 수 있는, 두 쪽 분량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법(法) 앞에 문지기 한 사람이 서 있다. 어느 시골남자가 이 문지기에게 와서 법 안으로 들어가기를 청한다. 그러나 문지기는 그에게 지금은 입장을 허락할 수 없다고 말한다.” 어려운 단어, 복잡한 문장, 지적 유희를 찾아볼 수 없다. 간결하고 소박하다. 독일어를 두어 해 배운 사람이라면 직접 카프카의 독일어 표현을
몽골제국이 붕괴한 이후 이 거대한 옛 국가의 영토에 서는 어떠한 역사가 지속되었을까? 칭기스 칸과 그의 후예들은 동서로는 만주에서 동유럽에 이르고, 남북으로는 북극해에서 남아시아에 이르는 광대한 중앙유라시아 지역 중 절반 이상을 통치하는 대 제국을 건설했다. 사람들은 대 제국의 크기에 압도되어 경외하기도 하고, 무자비한 살육과 통치에 경악하며 비난하기도 했다. 그리고 제국은 붕괴했다. 제국의 몰락과 함께 이 지역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도 사라졌다. 『몽골제국의 후예들』은 서두에서 제기한 질문에 대한 답변이자, 중앙유라시아 지역에 대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는 어떻게 인체에 감염됐을까?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2002년 사스, 2012년 메르스와 동일하게 ‘박쥐’를 지목한다. 박쥐의 코로나바이러스가 사향고양이를 통해 전파된 것이 사스이고, 낙타를 통해서 전파된 것이 메르스다. 최근 연구자들은 이와 비슷하게 코로나19도 박쥐가 숙주이며 중간 매개체는 천산갑, 족제비오소리, 토끼 등이라고 의심한다. 거의 10년 주기로 나타나고 있는 이와 같은 전염병의 근본적 원인은 무엇일까? 수의사이자 언론인인 마크 제롬 월터스는 『에코데믹, 새로운 전염병이 몰려온다』(북갤럽,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