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영향을 끼친 인물이나 책을 말하라고 하면 나는 장준하 선생의 를 든다. 고등학교 시절 책 읽기를 좋아해 종종 들르던 동네 서점에서 발견한 책이 장준하 선생의 였다. 얼마나 흥미진진한지 단숨에 읽었고 책을 읽으며 나는 애국심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 이때부터 장준하 선생은 나의 롤모델이 되었다. 장준하 선생은 평양 숭실중학교에 입학하였다가 부친이 교목으로 있는 신성중학교로 전학하여 그곳을 졸업했다. 평양숭실전문학교에 진학하려 했으나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가 되자, 후에 일본 도요대학 철학과에서 공부했고, 일본신학교로 전학했다. 1944년 결혼한 지 일주일 만에 일본군 학도병에 징집되어 중국으로 갔으나 탈출을 한다. 탈출부터 약 6개월 동안 6천리의 중국
“저는 목회하면서 늘 마음에 가진 생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 다음으로 두려운 대상은 평신도라고 하는 생각 말입니다.” 상기의 글은 사랑의 교회 담임목사이셨던 고 옥한흠 목사님으로부터 받은 이메일의 한 구절이다. 2004년에 『성경속의 경제학』이란 졸저를 우편으로 보내드렸는데, 감사하다는 이메일을 바로 보내주셨다. 평소에도 개인적으로 존경하던 분이었는데, 그날 이후로 옥 목사님은 나의 멘토가 되었다. 명성 때문에 멘토로 모신 게 아니고 평신도 한 사람 한 사람을 진정으로 배려하는 겸손함에 반해서였다. 개인적으로 만날 기회는 없었지만 그분의 설교와 언행일치가 내겐 존경과 도전이 되곤 하였다. 돌이켜 보면 내게는 몇 분의 멘토가 있는데, 내게 옥 목사님은 특이한 멘토이시다. 그분의 이
내 인생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분은 대학교 때의 은사님이다. 내가 그 분을 처음 뵌 것은 1988년, “88 올림픽”을 할 무렵이니 벌써 28년이나 되었다. 그 당시 30대 중반의 젊은 교수님이 이제는 정년을 앞두고 계신 노교수님이 되셨다. 대학교 4학년생이었던 나는 그 당시의 그 분보다 훨씬 나이 많은 교수가 되어 있다. 그 분은 쉬운 길과 어려운 길이 있을 때 어려운 길을 가라고 말씀하셨다. 단기적으로는 힘든 결정이지만, 그것이 결국 나를 자라게 하는 것이라는 말씀을 항상 하셨다. 음지가 있으면 양지가 있으므로 항상 희망을 잃지 말라고, 일의 우선 순위를 정할 때는 나보다는 남에게 좋은 순서대로 정하라고도 말씀하셨다. 내가 교수가 되고자 할 때, 학교를 선택할 때, 새로운 일을 하고자 할 때
4년 전, 유네스코(UNESCO)는 소설가 헤르만 헤세, 음악가 드뷔시, 사상가 루소와 함께 다산 정약용 선생을 세계문화인물로 선정했습니다.유네스코 세계문화인물로 우리나라 위인이 선정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지요. 2012년은 다산 탄생 250주년을 기념하는 해이니 더욱 의미가 깊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산은 강진에서 16년째 유배생활을 하던 1816년 5월, 큰아들 학연(學淵)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냅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천하에는 두 가지 삶의 기준이 있는데 하나는 시비(是非)에 따른 기준이다. 시비에 관한 기준은 무엇이 옳고(是) 무엇이 그른가(非)를 판단하는 기준이어서 공적이고 객관적인 기준이다. 반면에 이해(利害)에 의한 기준은 개인적인 차원의 것으로 자기에
나는 세칭 일류라고 하는 부산중, 경남고를 다녔다. 그러다보니 탁월한 실력을 갖춘 선생님들을 많이 만나 뵐 수 있었다. 그러나 선생님들로부터는 지식이랄까, 문제 푸는 방법만을 배웠던 것 같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대개 그러하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일찍이 세네카는 “인생보다 어려운 예술은 없다. 다른 예술, 다른 학문에는 얼마든지 스승이 있지만”이라고 말했는지도모른다. 그런데 어떤 인연에서인지, 인생의 멘토를 만나게 되었다. 고등학교 1학년 가을 무렵, 한 학년 선배였던 최상태 형이 찾아와 “야, 내가 나가는 교회에 끝내주는 선생님이 오셨으니 같이 가자”고 꼬드겼다. 나는 흔하디 흔한 ‘전도’라 생각하고 시큰둥했는데, 하도 여러 차례 찾아와서 강권하는 바람에 친구 놈과 둘이 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