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 인간과 공동체의 흐름, 그리고 그것에 대한 도태를 희망하지 않는 현대인으로서의 필자는 항상 한 공동체, 그리고 그 공동체 이상의 지적 담론의 필요성에 대해 오래 전부터 고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고심의 답은 다름 아닌 ‘교육’에 있었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 그러하면서 동시에 인간을 ‘타 개체와 동일하게 만들지 아니하는 것’, 그것의 온전한 수행은 전적으로 교육의 영역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에 따라 필자는 (숭실을 돌아보며) “대학 교육에서는 무엇을 얻어야만 하며, 이에 따라 어떠한 시스템을 구축하여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자연스럽게 빠져들었다.

  답을 찾는 것은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대학 교육은 ‘전문성’과 ‘학문의 엄밀성’을 모두 요구하며, 이에 따라 ‘학과의 구분’을 엄밀히 수행하는 속성을 지닌다. 그것은 분명 학문을 연구해야 할 의무가 내재되어 있다는 의미를 드러내며, ‘학문 일반’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필수적임을 의미하기도 한다. 필자는 이러한 대학의 본질을 긍정하며, 그것이 답이라고 결론 내렸다. 학문의 엄밀성이 실현되고 그것에 따라 각각의 시민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고유의 전문성을 가지는 것. 필자는 바로 그것이 공동체에 ‘가능성’을 선물한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이러한 시스템은 국가의 중요 이익에 따라 무시되고 있다. 국가는 대학에게 실용과 ‘경제성’만을 요구한다. 국가의 논리에 따라 대학 내의 사업성 있는 학문은 증대되어야 하며, 순수 학문은 축소되어야 한다(학문의 통폐합, ‘융합 인재’ 담론과 같은 사회적 주제 또한 그러한 국가의 요구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옳은가? 전혀 그렇지 않다. 학문의 발전은 그것의 깊이의 정도에 따라 완성된다. 그리고 그러한 완성은 역설적이게도 타 학문과 유기성을 발휘한다. 유발 하라리의 인터뷰 중 그의 박식의 측면에 대한 언급이 이러한 유기성의 자연스러움을 입증한다. 그의 의견에 따르면 학문은 분리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는 결코 학문의 경중을 논하지 않는다. 그의 박식함은 언제까지나 ‘각 영역이 각 영역에서 고유함을 보존하고 있을 경우’를 상정하지, 경중을 논하며 한 학문을 다른 학문의 도구로 전락시키지 않는다. 한 가지에 대한 집중을 위해 수백 가지, 수천 가지의 집중을 포기하고(혹은 발전을 포기하고) 결과적으로 학문적, 정치적 담론을 정체시키는 것. 그것이 ‘공동체의 방향’을 제시하는 주체가 저지를 일은 아니다.

  대학 교육은 전적으로 학문에 집중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 여러 영역을 통달하는 것에 대한 방법론은 이미 의무 교육의 영역에서 제시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학 교육의 보전이 가져오는 결과는, 각각의 시민들이 각각의 ‘고유성’을 가짐과 동시에 ‘유연성’을 겸비하여 무한한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의 보존을 의미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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