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24일과 25일에는 헝가리의 명문 외트베시로란드 대학(ELTE)에서 국제학술회의가 열렸습니다. 그 회의에 참석했던 저는 남는 시간을 이용해, 부다페스트 교외에 위치한 루카치 죄르지(Lukács György, 1885-1971)의 묘소를 참배했습니다. 그는 설명이 필요 없는 헝가리 출신의 철학자이자 비평가이며. 정치인이기도 하지요. 저에게 루카치는 그 무엇보다도 『소설의 이론(Die Theorie Des Romans)』(1916)의 저자로 각인되어 있습니다. 어린 저에게 이 책은, 소설이 인류사의 진행과 함께 나아가며, 때로는 그 방향까지도 제시할 수 있는 예술장르임을 알려주는 복음처럼 다가왔습니다. 가을 단풍이 막 들기 시작한 동유럽풍의 루카치 묘소를 찾는 일은, 어쩌면 문학에 대한 막연한 동경만으로 청춘의 열병을 앓던 스무 살 시절의 저를 만나는 일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주지하다시피 최근 한국 소설은 루카치가 『소설의 이론』에서 말한 시대와의 상동성을 본질로 하는 소설과는 거리가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이에 대한 성찰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최근에는 ‘월급사실주의’라는 동인이 탄생해 문단에 충격을 주고 있는데요. 이 모임의 대표 격인 소설가 장강명은 ‘월급사실주의’를 “평범한 사람들이 먹고사는 문제를 사실적으로 그리는 한국소설이 드물다. 우리 시대 노동 현장을 담은 작품이 더 나와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공유한 작가들의 모임이라고 설명합니다. 얼마 전에는 ‘월급사실주의’가 첫 번째 작품집 『귀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문학동네, 2023)를 내놓았는데요. 여기 수록된 11편의 소설은, 삼각김밥 공장노동자, 학습지 교사, 군무원, 중소기업 직원, 현장소장, 여행사 직원, 기자, 세입자, 배달 라이더, 한국어교사, 통번역가, 기간제 교사 등을 주인공으로 하여 생생한 노동현장을 그려낸 것들입니다. 

  그중에서 주원규의 「카스트 에이지」는 꿈과 희망으로 가득해야 마땅한 스무살 청춘의 암울한 삶을 그려낸 작품입니다. 주인공 태양은 이름과는 달리 어두컴컴한 지하철 2호선에서 잠을 자며, 배달과 택배 상하차 일을 합니다. “최소 만 원 이상 깨지는 찜질방을 선택”할 여유도 없기에, 지하철을 침소로 결정한 것인데요. 이 작품에서 태양은 ‘기계’가 될 것을 강요받습니다. 첫 번째는 ‘노동기계’가 되는 것입니다. 배달 라이더로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서는 ‘중침’과 ‘신호위반’은 다반사로 해야 하며, 택배 상하차 일을 할 때면, “어느 순간, 내가 박스의 일부가 되어 선별 적재장으로 빨려들어가는 컨베이어 벨트로 내동댕이쳐지는 기분”이 들기도 하는 것입니다. 기계로 비유되는 노동자의 소외는 자본주의 사회의 고질적인 병폐로 오래전부터 이야기된 현상이지요.   

  「카스트 에이지」의 새로움은 ‘노동 기계’와는 다른 또 다른 성격의 ‘기계 되기’가 태양에게 강요된다는 점입니다. 태양은 ‘노동 기계’가 되는 것이 두려워 멘토의 유튜브를 눈이 시뻘개지도록 듣고는 하는데요. 멘토가 늘 하는 말은, “세상의 모든 자본주의는 착취라는 이상을 소유한 자가 발동하는 계획에 의해 기계적으로 움직이기 마련”이며, “그 흐름에 편입하지 않으면 희망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멘토는 끊임없이 제삼시장 주식, 공매도, 부동산 경매, 신흥 코인 투자법 등을 유튜브에서 강의(강요)합니다. 태양은 ‘노동 기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멘토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하며, 결국 코인 투자를 하거나 제삼금융권에서 투자금을 빌리다가  빚을 지기도 합니다. 2023년을 살아가는 한국의 스무살 청년 이태양은 ‘노동 기계’와 더불어 ‘투자(투기) 기계’ 되기를 강요받는군요. 

  태양이 ‘노동 기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선택한 것은 멘토의 유튜브를 찾는 것과 더불어 여자친구의 집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멘토로부터는 ‘미래라는 희망’을 선물 받을 수 있고, 여자친구에게서는 ‘인간의 온기’를 선물 받을 수 있기 때문이겠죠. 그리고 이 둘을 통해서만 ‘노동 기계’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미래와 인간을 감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자친구 역시 각종 명목으로 태양에게 돈을 요구합니다. 그렇기에 태양은 ‘노동 기계’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투자 기계’가 되어야만 하고, ‘투자 기계’가 되기 위해선 다시 ‘노동 기계’가 될 수밖에 없는 무한 반복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러한 태양의 상황은 제목에 사용된 ‘카스트(caste)’라는 단어가 결코 과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카스트(caste)는 인류가 고안해 낸 가장 끔찍한 인도의 신분 제도로서, 인도에서는 무려 40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며 지금도 위세를 떨치고 있지요. 주원규는 바야흐로 한국 사회의 계급 문제가 카스트와 같은 신분 문제로 형질변경 되는 중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일찍이 루카치는 소설이 형이상학적 지향은 물론이고 모든 가치가 사라진 역사적 상황에서, 진정한 가치와 총체성을 추구하려는 인간 존재의 동경을 형상화한 근대의 서사시라고 규정했습니다. 「카스트 에이지」에는 계급 문제가 신분 문제로 변모하는 역사적 상황이 강렬하게 형상화되어 있지만, 가치와 총체성을 향한 무한한 동경으로서의 자의식은 부족합니다. 이러한 ‘루카치적 요소’의 충족과 결핍을 통해 오늘의 한국소설은 새로운 출발을 시작하는 것이라는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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