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다페스트의 외트베시로란드대학(ELTE)에서 국제학술회의를 마친 연구자 일행은 10월 27일에 체코의 프라하로 학술탐방을 떠났습니다. 삼척동자도 알다시피,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는 프라하에서 나고 살다가 죽은 세계적인 작가입니다. 2023년 가을의 프라하는 카프카로 인해 환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공식적으로 프라하市에서 카프카를 기리는 장소만 무려 33개에 이를 정도였으니까요. 거기에는 프라하의 아버지가 운영하던 옷가게도 있었고, 카프카가 14년이나 근무하던 보헤미아왕국노동자상해보험협회 건물도 있었으며, 카프카가 많은 작품을 집필했던 황금소로의 오래된 건물도 있었습니다.  

  카프카의 모든 작품이 명작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지만, 그중에서도 기억에 가장 선명하게 남아 있는 작품은 “어느 날 아침 악몽으로 뒤척이다 잠에서 깨어난 잠자는 침대에 누운 자신이 흉측한 벌레로 변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변신Die Verwandlung」(1916)입니다. 회사원인 그레고르 잠자는 매일 같이 출장을 가는 고역과 지속적이지 못한 대인 관계 등으로 괴로워하며, 자신의 생활을 “악마가 가져갔으면!”이라고 말할 정도로 저주합니다. 그럼에도 그는 가족들 생각에 직장을 그만두지 못하는 생활을 이어갑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벌레가 되었기에 그레고르 잠자는 처음으로 ‘악마에게 줘버리고 싶은 직장생활’로부터 벗어나는 여유를 누립니다. 그날만은 회사에 가지 않아도 되었으며, 그날 밤에는 “푹 잠을 잤으니”라고 표현될 정도로 꿀잠에 빠지기도 했으니까요. 통념과는 달리 벌레가 된 잠자는 불안과 혼란보다는 편안함과 안도감을 더욱 진하게 느끼는 것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그러나 사회적 효용을 잃은 그레고르 잠자는 가족으로부터도 외면받다가, 결국 쓸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레고르 잠자는 ‘악마에게 줘버리고 싶은 생활’을 하고 있기에, 어쩌면 ‘벌레 잠자’는 ‘실제 잠자’에 해당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카프카가 프라하에서 ‘벌레가 된 회사원’을 그린 「변신」을 창작한 때로부터 100여 년이 지난 지금, 한국의 작가 구병모는 「있을 법한 모든 것」(『굿닛』1호, 2022년 12월)에서 아예 얼굴이 사라져 버린, 그리하여 “있지만 없는 존재”인 비대면 노동자를 다루고 있습니다. 작가인 C는 로맨스 콘텐츠 집필을 청탁받고는, 창작의 영감을 얻고자 자신의 꿈을 되새겨 봅니다. 그 꿈은 호텔에 머무는 남성이 자신의 룸을 청소해주는 키퍼와 얼굴 한번 마주치지 않은 채 메모만을 주고받으며 감정의 드라마를 이어간다는 내용입니다. 

  「있을 법한 모든 것」에는 호텔 청소 노동자 이외에도 중지와 검지만 내보이며 매점 부스에서 일하는 판매원, 집주인이 부재할 때만 일하는 가사도우미 등의 비대면 노동자들이 등장합니다. 비대면 노동자들은 “자기 자신을 지우도록 요구받는 이들”로서, “누구나 그들이 보이지만 안 보이는 척하며, 그들은 거울에 튄 한 점의 물때나 타일에 떨어진 한 올의 머리카락과 다르지 않은 범주로 취급”되고는 합니다. 그렇다고 비대면 노동을 꼭 부정적으로만 바라볼 필요는 없습니다. 사소한 관계에서도 늘 갑이 되어 행세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에서, 비대면 노동은 무례한 자들의 “선 넘는 관심이나 무례한 참견”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노동의 형태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있을 법한 모든 것」에도 사소한 불만 때문에 매점 부스 안에서 일하는 판매원을 향해, “나 봐. 똑바로 여기 구멍 앞에 딱! 나 보고 얘기하라고”라며 큰소리치는 주정뱅이가 작품의 한복판에 떡하니 버티고 있네요. 

  그러나 작가 구병모는 아무래도 ‘얼굴’을 통한 교류가 지닌 가능성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처음 C는 면접 때만 얼굴을 보았던 가사도우미와 메모나 선물을 주고받으며 다정한 인간의 온기를 나누지만, 안타깝게도 그 온정의 시간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는군요. C는 우연히 보게 된 CCTV에서, 자신이 아는 가사도우미와는 다른 인물이 자신의 집에서 일하는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랍니다. 

  그날 밤 “이를 갈면서 잠자리에 든” C는 자신이 맞닥뜨린 현실과는 다른 꿈을 꿉니다. 메모를 통해서 감정의 교류만 나누던 호텔 투숙객인 남자와 키퍼가 드디어 서로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얼굴을 확인하고 나자 그는 비로소 타인에 대해 응답을 하고 타인으로 인해 상처받을 용의도 있는 마음의 준비가 되었음”을 깨닫습니다. 진정한 이해와 관계는 타인의 ‘얼굴’을 바라보는 순간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레비나스는 타인의 ‘얼굴’이야말로 존재의 고유성(존엄성)을 담보하며, 그것을 바라보는 자들에게 무언의 말을 건넨다고 했습니다. 어쩌면 인간은 ‘벌레’를 넘어 키오스크(kiosk, 공공장소에 설치된 무인 정보 단말기)가 되어 가고 있지만, 그런 시대일수록 우리에게 더욱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타인의 ‘얼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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