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토) 본지는 본교 생활협동조합(이하 생협)에서 주최한 ‘제26회 생협 조합원 문화답사’에 동행했다. 생협 조합원 문화답사는 생협 조합원의 건강한 대학 생활을 지원하기 위해 진행하는 문화‧복지 사업의 일환으로 시행됐다. 이번 제26회 생협 조합원 문화답사는 가을 정취와 함께 역사와 전통을 느낄 수 있는 경북 영주로 여정을 떠났다.

  영주에 가다
  경상북도 영주시는 동쪽으로는 봉화군을, 서쪽으로는 충청북도 단양군을 접한다. 또  북쪽으로는 강원도 영월군을, 남쪽으로는 안동시와 예천군과 접하는 소백권과 태백권 교통의 중심지이다. 선비의 고장이라고 불리며 본교에서 차량으로 3시간가량 소요된다.

  부석사(浮石寺)
  문화 답사의 첫 발길을 내디딘 곳은 부석사다. 부석사 주차장에서 입구까지 이어지는 산책로에서 만난 은행나무는 노랗게 물든 전경을 선사했다. 은행나무와 단풍나무가 즐비해 단풍 명소로 알려진 부석사는 주말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방문했다.

  부석사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7곳의 산사(山寺) 중 한 곳이다. 산사는 주변 자연을 경계로 삼아 산 안쪽에 위치한 특징을 가진 사찰이다. 오늘날까지 불교 출가자와 신자의 △수행 △신앙 △생활 등이 산사에서 이뤄지고 있다. 부석사는 5개의 국보와 6개의 보물을 소장하고 있다. 부석사가 국보로 소장하는 문화재로는 △무량수전 △소조여래좌상 △조사당 △조사당 벽화 △무량수전 앞 석등이 있고 보물로 소장하고 있는 문화재로는△석조여래좌상 △삼층석탑 △당간지주 △고려목판 △오불회 괘불탱 △석조석가여래좌상이 있다. 

  부석사에 오르는 방법은 돌계단을 오르는 방법과 옆길로 굽이굽이 돌아가는 방법이 있다. 본 기자는 오를 때는 옆길로, 내려올 때는 계단으로 내려오는 것을 추천한다. 오르는 길목에 단풍나무가 이어져 있어 구경하기 좋고 내려올 때는 부석사의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전경을 바라보기 좋다.

  부석사를 오르면 삼층석탑을 지나서 안양루를 볼 수 있다. 안양루는 부석사 경내에 있는 문루로 지난 1555년 강운각이 화재로 불타 없어진 후 지난 1576년에 재건했다. 여기서 ‘안양(安養)’이란 ‘극락’을 뜻하는 말이다. 안양문은 ‘극락에 이르는 문’을, 안양문을 지나 나오는 무량수전은 ‘극락’을 상징한다. 무량수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이뤄진 팔작지붕 주심포계 건물인 동시에 부석사의 본전(本殿)이다. 또한, 무량수전은 목조 구조 기술의 정수라는 배흘림기둥이 있다. 배흘림기둥이란 목조 건축에서 중간 정도의 직경이 가장 크고 위아래로 갈수록 직경이 점차 줄어드는 기둥이다. 보통 사람은 긴 기둥을 보면 가운데 부분이 홀쭉하게 들어간 것처럼 착시를 본다. 가운데 부분을 약간 볼록하게 만들어 주면 기존 기둥보다 시각적 안정감을 줄 수 있다고 한다. 무량수전은 한국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오래된 건물 중 하나로 건물에 깃든 웅장함이 느껴진다.

영주 부석사 소조여래좌상으로 국보 제45호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소조불상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것으로 가치가 높다.
영주 부석사 소조여래좌상으로 국보 제45호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소조불상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것으로 가치가 높다.

  무량수전에는 소조여래좌상이 있다. 소조여래좌상은 무량수전의 본존으로 다른 불상과는 특이하게 측면을 바라보고 있다. 본존은 법당에 모신 부처 가운데 가장 으뜸인 부처를 뜻한다. 소조여래좌상의 시선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향하고 있다. 시선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향하게 된 배경에는 서방 정토 극락세계를 주재하는 아미타부처를 향해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것이라는 설이 있다. 소조여래좌상은 통일 신라 시대 불상 양식의 전통에 따라 정교한 제작 기법으로 제작된 고려 시대의 작품으로, 진흙으로 만든 불상 중 가장 크고 오래돼 우수한 평가를 받고 있다.

  무량수전 앞에서는 광명등이라고 불리는 석등이 있다. 이 석등은 국보 제17호로 통일 신라 시대 석등 중 가장 아름다운 석등으로 꼽힌다. 연꽃무늬를 조각해 놓은 윗받침 돌에서 우아한 분위기를 선사한다.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으로 국보 제17호다. 연꽃잎 조각이 되어 화려하고 아름다워 신라의 석등 가운데 최고로 꼽힌다.

  조사당은 부석사를 최초로 세운 의상대상의 상(像)을 안치한 건물이다. 전통적인 주심포식의 과도기적 건물로서 양식과 기법이 특이한 건물이다. 주심포는 고려 시대의 건축 양식으로, 지붕의 무게를 분산시키기 위해 기둥 위에만 짜임새를 만든 건축 양식을 말한다.

  부석사에 방문하면 해설 오디오를 빌릴 것을 권장한다. 부석사에는 다양한 문화유산이 있어 자칫하다 관람 요소를 놓칠 수 있다. 본 기자는 생협 측의 배려로 해설 오디오를 대여해 함께 관람했다. 특히 무량수전을 관람할 때 △배흘림기둥 △안쏠림 △귀솟음 등에 사용된 기법을 하나씩 찾아 가는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소수서원(紹修書院)
  점심 식사를 마치고 차량으로 20분가량 이동해 소수서원에 도착했다. 소수서원은 한국 최초의 사액서원이자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한국의 서원 9곳 가운데 하나다. 주세붕이 먼저 세운 백운동서원이 쇠락하자 퇴계 이황이 △편액 △서적 △토지 △노비 등을 하사한 후 소수서원으로 이름을 바꿨다. 여기서 소수는 ‘무너진 학문을 다시 이어 닦게 하다’라는 뜻이다. 소수서원에서는 문화 해설사의 설명이 따랐다. 소수서원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보물 제59호인 당간지주를 보았다. 당간지주는 절에 법회나 기도 등의 행사가 있을 때 절의 입구에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깃대를 당간(幢竿)이라 한다.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하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고 한다. 당간지주는 불교의 주요 건조물 중 하나다. 이처럼 유교의 성지인 소수서원에서 불교 유적이 있다는 점은 다소 의아하다. 원래 소수서원의 터에는 통일 신라 시대에 세워진 숙수사라는 절이 있었다. 소수서원의 당간지주는 숙수사의 한 흔적인 셈이다. 이어 ‘백운동 경(敬)자 바위’를 관람했다. 백운동 경자 바위는 백운동서원 시절 주세붕이 직접 ‘백운동(白雲洞)’과 ‘경(敬)’이라는 글자를 새긴 바위다. 백운동 경자 바위에 세겨진 경(敬)은 ‘경천애인(敬天愛人)’의 첫 글자를 새긴 것으로 ‘하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하라’는 유교의 가르침을 잊지 말라는 뜻이다. 백운동 경자 바위 앞에는 죽계천이 흐른다. 주변 은행나무와 죽계천을 봤을 때 어딘가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알고 보니 여러 사극 드라마 촬영지로 유명한 곳이었다. 이곳에서 한 커플은 셀프 결혼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만큼 아름다운 배경이 가득한 장소라고 말할 수 있다.

문화 해설사가 소수서원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문화 해설사가 소수서원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죽계천 뒤편에는 ‘취한대’라는 정자가 있다. 원생이 자연을 감상하며 휴식을 취하던 공간이다. 처음 취한대 정자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취한’이라는 어감 때문에 술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옛 시 제목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취한대라는 이름은 퇴계 이황이 붙인 이름이다. 옛 시 ‘송취한계(松翠寒溪)’에서 따온 것으로 푸른 산의 기운과 시원한 물빛에 취하여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긴다는 의미다. 취한대의 전경은 바로 앞에서 바라보기보다 죽계천 건너편에 있는 소수서원에서 바라보는 것을 추천한다. 

  소수서원에 들어가기 전 보이는 ‘경렴정(景濂亭)’은 주세붕이 지난 1543년에 만든 정자이다. 이곳에서 원생들은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하며 풍류를 즐겼고 휴식과 교류를 했다. 500년 역사가 있는 은행나무와 함께 어우러져 있는 모습이 여유롭게 느껴진다. 이때 선선한 바람도 불어와 더욱 여유로운 경렴정의 분위기를 자아내게 한다.

경렴정과 은행나무가 어우러진 모습이다.

  경렴정을 지나 소수서원에 들어가면, ‘강학당(講學堂)’이라는 건축물이 반긴다. 강학의 뜻은 ‘논하여 깨우친다’는 뜻이다. 뜻에서 볼 수 있듯이 학문을 강론하는 장소였다. 대청마루 북편에는 명종이 친필로 내린 소수서원 편액이 걸려 있다. 건물의 연대와 가치를 인정받아 지난 2004년 보물 제1403호로 지정됐다. 강학당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장대석 높은 기단을 쌓아두고 자연석을 다듬은 형태의 건물이다. 강학당은 기본적으로 남북 방향으로 길게 늘어진 형태면서 서원 입구 앞에 바로 배치된 구조다. 강학당이 강학당에서만 탄생한 원생이 4,000명이 넘고, 퇴계 이황 문하생이 많아 역사적으로 중요한 장소로 불린다. 조선 정치사와 성리학문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장소라는 셈이다.

  강학당 좌측으로는 보물 제1402호인 문성공묘가 있다. 조선 최초의 주자학자인 회헌 안향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안보 △안축 △주세붕의 위패도 함께 모시고 있다. 매년 3월과 9월 초정일(初丁日)에 제향을 지낸다. 뒤쪽으로는 △직방재 △일신재 △학구재 △지락재가 어떤 형태로 이어 있다. 이곳은 유생들이 유숙했던 곳으로 현재 기숙사 역할을 가진 건물로 이해할 수 있다.

  주세붕이 소수서원을 세운 후 “교육이란 반드시 현인을 높이는 것에서 비롯되므로 사당을 세워 덕 있는 이를 숭상하고 서원을 세워 학문을 돈독히 하는 것이니, 교육은 실로 난리를 막고 기근을 구제하는 것보다 급한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처럼 조선시대부터 교육열이 뜨거웠던 것을 알 수 있었다. 약 480년 후인 지금도 여전히 교육열이 높다는 상황이 씁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소수서원 뒤편에 있는 백운교 다리를 건너면 선비촌으로 이동할 수 있다. 선비촌으로 가는 길에 △소수박물관 △기획전시실 △홍경루가 있다. 소수박물관은 관람은 지난 6월부터 오는 12월까지 시설 보수로 인해 휴관해 관람하지 못했다. 선비촌은 영주 선비들이 실제로 살았던 생활공간을 그대로 복원한 장소다. 선비촌에는 화개장터처럼 다양한 가게가 즐비해 있다. 직접 떡 방아를 찧어 인절미를 만드는 등 체험 활동도 할 수 있다.  

  무섬마을
  소수서원에서 40분가량 차량으로 이동 후 무섬마을에 도착했다. 무섬마을은 마을 전체가 중요 민속 문화재 제278호로 지정된 곳이다. 태백산에서 이어지는 내성천과 소백산에서 흐르는 사천이 만나 산과 물이 태극 모양으로 돌아나가는 지형이다. 이런 지형이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섬과 같다고 해, 무섬이라고 불리고 있다. 4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무섬마을은 만죽재와 해우당을 비롯한 9채의 문화재가 있고, 대부분의 가옥이 100년에서 200년가량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현재는 50가구 정도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마을에 소재한 가옥 가운데 38동이 전통 가옥이다. 전통 가옥 중 일부는 민박과 한옥 체험 등 숙소로 운영되고 있다. 마을이 전체적으로 한옥 고택과 정자로 어우러져 있어 고요하고 아늑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무섬마을의 골목이다. 한적함과 고즈넉함이 깔린 풍경이다.

  무섬마을에는 ‘ㅁ자 가옥’과 까치구멍집을 볼 수 있다. ‘ㅁ자 가옥’은 사방이 막힌 폐쇄적인 구조의 집이다. 바깥쪽에 사랑채가 있고 ‘ㅁ’자의 가운데 마당이 있으며, 안쪽에는 안채가 들어선 구조다. 까치구멍집은 ‘ㅁ자 가옥’에서 가운데 ‘마당 가지’ 지붕을 덮어 사방과 천장이 완전히 막힌 폐쇄적인 구조의 집이다. 심지어 외양간까지 집 안에 들어가 있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 환기에 문제가 있어 지붕 용마루의 양쪽 합각 부분에 구멍을 내 환기를 시킨다. 합각은 지붕 위쪽 양옆에  ‘∧’ 모양으로 붙인 두꺼운 널빤지로 이룬 각을 말한다.

무섬마을에 있는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모습이다.
무섬마을에 있는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모습이다.

  무섬마을 구경하고 외나무다리를 건넜다. 180m 길이인 외나무다리는 생각보다 높고 폭도 좁아 짜릿함을 느낄 수 있다. 외나무다리를 건너면 단풍이 물들어 가는 산과 잔잔한 강을 볼 수 있다. 자연을 느끼며 색다른 체험을 원한다면 외나무다리를 건너 보라. 매년 9월에서 10월 무섬마을에서 외나무다리 축제도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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