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오스트리아 빈에 가게 된다면, 가장 먼저 프로이트 박물관에 가보겠다고 늘 생각하고는 했습니다. 한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였던 빈의 베르가세 19번지의 2층에 위치한 프로이트 박물관은,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가 나치의 탄압을 피해 1938년 런던으로 이주할 때까지, 무려 40여 년 동안 환자들을 돌보던 사무실이자 집으로 사용했던 곳입니다. 『꿈의 해석』(1899)과 같은 명저가 이곳에서 쓰인 것은 물론이고, 수많은 내담자들이 자신의 심연과도 같은 내면을 임상의 프로이트에게 고백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프로이트 말년의 동영상까지 갖춰져 있을 정도로 세심하게 복원된 이 박물관에는, 그 유명한 ‘프로이트의 소파(내담자를 위한 장의자)’가 방문객들을 따뜻하게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부다페스트에서 국제학술회의를 마치고, 우리 연구진이 빈을 방문한 날은 마침 10월 26일이었습니다. 이 날은 1938년 독일에 강제합병된 오스트리아가 제2차 세계 대전 뒤 독립을 하게 된 국경일이었는데요. 혹시 문을 닫지는 않았을까 마음을 졸이기도 했지만, 다행히 박물관은 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었습니다. 공휴일임에도 무척이나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는 박물관을 거닐며, 예술만 영원한 것이 아니라 때로는 학문도 영원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프로이트가 창시한 정신분석학으로부터 빚을 지지 않은 예술가나 학자는 찾아보기 어려울 겁니다. 그가 발견한 ‘무의식’의 세계는 인류의 인간 이해를 그 근본에서부터 바꿔 놓았으니까요. 이토록 위대한 프로이트는 인간의 근본적 심리 문제들이 가족 관계로부터 비롯된다고 보았습니다. 인간 정신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무의식은, 우리가 가족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인지하고 그러한 자기규정에 반응하는 방식에 따라 탄생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견해는 수많은 이들에게 빛과도 같은 비전을 선사했지만, 동시에 들뢰즈나 가타리 같은 후배들로부터는 모든 심리적 문제를 가족 관계로 환원하는 비정치적인 주장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랬던 것인데, 근미래를 배경으로 하여, ‘지금-여기’ 한국 사회의 민감한 문제들을 다루는 데 도통한 소설가 김강이 「우리 아빠」(『끌어안는 소설』, 창비, 2023)라는 소설을 통해, 가족 관계와는 무관한 ‘우리 아빠’, ‘우리 엄마’, ‘우리 아들’을 그려 보이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우리 가족’ 사업을 주요한 배경으로 삼고 있는데요. 그 사업의 내용은 ‘생산 인구의 감소, 노인 인구의 증가, 출생률 저하’로 고민하던 정부가 국가의 명운을 걸고 신생아 출생률(생산률)을 높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건강한 남자들과 여자들의 정자와 난자를 구매하여 아이를 낳는 것입니다. 이 사업에 관여하는 남자들은 ‘우리 아빠’가, 여자들은 ‘우리 엄마’가, 태어난 아이는 ‘우리 아이’가 되는군요. ‘우리 아이’들은 부모가 누군지도 모른 채, 국가의 손에 의해 무럭무럭 성장합니다. 2031년 처음으로 ‘우리 아이’가 탄생하였고, 소설의 현재 시점인 2051년에는 성인이 된 ‘우리 아이’가 사회에 진출하고 있습니다. 

  주인공인 종대는 무려 17년째 ‘우리 아빠’로서 생활해 왔지만, 아쉽게도 그 안정된 일도 나이 제한(만 40세 이하)에 걸려 그만두어야 합니다. 작가는 ‘우리 아빠’의 원년 멤버로서 혁혁한 공을 세운 한철이 형과 종대의 대화 등을 통해 ‘우리 가족’ 사업이 지닌 문제들과 ‘우리 아빠’로서의 내밀한 고민 등을 잔잔하게 펼쳐 놓습니다. 잔뜩 술에 취해, 고함도 지르고 싸움도 벌이는 한철과 종대는, 아마도 프로이트가 인간 존재의 중핵이라 부른 무의식을 지닌 인간들임에 분명해 보입니다.  

  그런데 김강은 ‘프로이트주의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아이’들에게는 곡절 많은 심리적 드라마를 써 나갈 가족 관계가 원천적으로 배제되어 있습니다. 프로이트는 인간 정신의 본질인 무의식은 유년 시절의 가족 관계로부터 탄생한다고 했는데요. 그래서일까요? 이 작품의 초점화자인 종대는 물론이고, ‘우리 아빠’에서 은퇴한 이후에는 ‘자기 아이’를 갖겠다는 야망을 불태우는 한철이 형의 내면도 훤히 드러나는 것과 달리, ‘우리 아이’의 내면은 한 번도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단지 편의점 등에서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수행할 뿐이네요. ‘우리 아이’들은 인간으로서의 내면이 결여된, 그야말로 공적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하나의 사물로서 기능하는 것입니다. 이 완전한 침묵 속에 놓여진 ‘우리 아이’의 모습이야말로, 국가권력이 생명까지 관리하는 디스토피아에서 벌어지는 문제를 압축해 놓은 것으로 보입니다. 어쩌면 김강은 「우리 아빠」의 후속작을 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된다면, 아마 후속작의 제목은 ‘우리 아빠’가 아닌 ‘우리 아이’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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