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가을이면, 다수의 교수들이 엄청난 분량의 원서를 읽느라 바쁘다. (올해는 내가 아니라서 다행이긴 하지만) 대부분 학생을 면접으로 뽑는 우리 학과도 마찬가지다. 역설적이지만, 읽어야 할 원서는 정체가 없다. 순번만 있을 뿐, 이름도, 성별도, 출신도 다 지워진다. 일부러 ‘모르게’ 만든 원서를 읽으며, 우리는 그 배후의 존재를 ‘알아내려’ 낑낑댄다. 무엇보다 쉴 새 없이 반복되고 재활용되는 상투어가 힘겹다. 올해부터는 없어졌지만, ‘자소서’를 읽는 일은 그래서 더 곤혹스럽다. 진솔한 자기소개로 가장하지만, 실은 합격이라는 목적에 맞게 조작된 언어다. 우리도 그 사실을 잘 안다. 그래서 행과 행 사이에 숨었을 진실을 찾아 정체 모를 숫자들과 숨바꼭질을 한다. 거창하게 말하면, 텍스트의 모호함과 모순 사이에서 사태의 진실을 알아내려는 데리다식 ‘해체’다.

  사실 입시만큼 비교육적인 일도 많지 않다. 우리 학과엔 아무런 관심도 없지만, 우리 학과의 ‘입시 전략’적 이점을 노리는 학생은 많다. 그래서 우리 학과에 정말 관심이 있다고 고백한다. 한 여인의 재산이 탐나서, 그녀를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모양새다. 연애 드라마에서는 나쁜 짓이지만, 입시에서는 현명한 전략으로 권장된다(우리 학교도 그렇게 홍보하다, 우리 학생들로부터 분노에 찬 항의를 받은 적이 있다). 물론 교육 측면에서는 최악이다. 목적 달성을 위한 경쟁에서는 소중한 가치도 팽개칠 수 있다는 메시지니까. 

  올바른 가치가 힘을 잃으면, 욕망이 지배한다. 이런 사회는 위험하다. 르네 지라르의 지적처럼, 욕망은 경쟁을 야기하고, 격화된 경쟁은 폭력을 부추긴다. 이는 결국 개인적, 사회적 살인으로 이어진다. 우리 사회 역시 교육은 잃고 경쟁만 남은 것처럼 보이곤 한다. 성장 평가를 위한 시험이 이젠 석차 산출의 도구다. 시험의 핵심 요건은 수준의 적절성이 아니라 ‘변별력’이다. 그래서 더 못한 사람을 제거하는 ‘킬러 문항’이 필요하다. 이런 경쟁의 열매는 쓰다. 밤 열 시, 학원 가기 전, 초등생들이 고카페인 음료를 사 마신다. ‘굿네이버스’ 관계자에 의하면, 강남구 ‘초등학교’ 교장들이 가장 많이 요청하는 강연 주제가 자살 예방이라 한다. OECD 나라 중 청소년 행복 지수가 거의 바닥이라는 사실도 떠오른다. 교육이라는 이름의 경쟁이 야기하는 폭력과 살인의 섬뜩한 단면들이다. 

  생존을 위한 무한 경쟁 시대에 올바른 삶에 대한 고민은 사치일까? 아니면 그런 발상 자체가 욕망 중독의 증상일까? 입시가 하나의 철(계절)로 존재하는 나라, 수능일엔 온 나라가 출근 시간을 늦추고, 듣기 평가 시간에는 비행기도 뜨지 않는 흥미로운 나라. 이런 나라에서 사람답게 사는 것은 어떤 것일까? 그리고 그렇게 사는 사람을 가르치고 기르는 일은 무엇일까? 잠시 하릴없는 생각에 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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