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 없는 시대다. 태양은 여느 때처럼 뜨거운데 거울 속은 온통 흑백이다. 채도가 선명하고 탁했는지는 잊은 지 오래다. 우리는 명도로만 사람을 구별한다. 그러나 이 흑백은 얼마나 많은 빛을 흡수했던가. 흐르는 대로 흘러가는 부표 같은 하루를 살다 보면 ‘델핀’이 보여준 치열한 획득에 대해 떠올리게 된다. 18세기에 맞이했던 천상의 타격을 잊은 채 인류는 개성을 잃었다.

  누벨바그의 새로운 물결이 1950년대 영화사를 장식했다. 프랑스에서 활동하던 젊은 영화 감독들은 스튜디오 시스템이 찍어내는 부르주아 스타일 영화에 저항했다. 그들이 제작한 장르 영화는 으레 지켜지던 영화 규칙에 반칙을 가했다. 마치 영화를 충분히 사랑하고 비평할 수 있다면 영화를 공부하지 않고도 영화를 만들 수 있다고 말하는 듯했다.

  “게으른 청춘/모든 것에 노예 되는 과민한 신중성 탓에/저는 인생을 잃었습니다/아아! 마음이 사랑만에 열중하는 그런 시간이 오기를!” 에릭 로메르의 영화 〈녹색광선〉은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아르튀르 랭보의 시구로 시작한다. 청춘에 대한 노스탤지어에 빠진 화자는 젊음에 게을러 섬세한 인생을 잊었다고 탄식한다. 이는 스스로 만든 문명에 자신이 가장 쉽게 휩쓸리던 우리들의 모습을 기억하게 한다.

  이 영화가 남기는 시각적 잔상은 녹색과 빨간색의 대비다. 영화는 이 대비를 통해 주인공 ‘델핀’을 적극적 낭만주의자로 대변한다. 델핀이 그녀 친구의 가족들과 식사하는 장면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피를 흘리는 동물은 먹지 않는다는 델핀을 향해 저마다 질문을 던진다. 손님인 그녀에게 대접할 음식이 많지 않다는 생각에 선의로 시작한 질문이었다. 일반적이지 않은 신념에 거드는 가벼운 한마디들은 곧 거듭 쏟아지는 비난이 된다.

  델핀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정육점이 육류 소비에 있어 인식의 문제를 야기한다는 지점을 꼬집는다. 이미 도축된 고기를 구매할 때면 우리는 그 동물이 어떻게 죽었는지 알 수 없고 신경 쓰지 않게 된다. 그녀는 이렇게 덧붙인다. “본능적으로 이렇게 먹게 된 것 같아요” 이 평범하고도 잔인한 선의 앞에 델핀은 외로운 투사가 되어 있었다.

  녹색은 빨간색보다 위에 있다. 태양이 수평선 아래로 내려가는 그 찰나에 녹색 섬광이 관측된다. 이 영화의 모티브 작품인 쥘 베른의 소설 『녹색광선』은 빛의 극심한 굴절로 생기는 이 마술적 리얼리즘이 우리 안에 위장된 감정을 허물어 버린다고 말한다. 시선이 닿으면 새롭게 등장하는 세계와 경계에 닿으면 사라져 버리는 세계. 우리는 우리가 이 공간에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잊는다. 그러나 내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도 분명히 존재하는 세계다. 우리에겐 고집해야 하는 어떤 신념이 있고 획득해야 하는 어떤 무명의 공간이 있다. 이를 살아 내면서 불현듯 찾아올 공허와 짜증 그리고 비존재와 상실들에 미리 이 영화를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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