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가 이어진다. 서로의 관심사를 주고받는 와중 맺음말 뒤에 이어지는 한마디. “아니, 근데….” ‘아니’와 ‘근데’. 나의 말버릇, 혹은 우리의 말버릇이라 할 수 있겠다. 물론 이 단어들을 추임새로 봐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이해한다고 해서 이 낱말들의 의미가 변하지는 않는다. ‘아니, 근데’ 이 말 안에서 타인은 부정되고, 대척된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마냥 동의하고 수용하는 것이 좋은 일이 아님은 알고 있다. 그렇지만 무작정 부정하고 반대하는 일 역시 바람직하지 않다. 개인의 고유성은 그 사람이 사용하는 어휘와 어법에서 생겨나는 것인데(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이와 같은 어휘가 통용되는 현실은 우리의 고유성이 부정과 반대의 생김새를 띠고 있다고 말해 주는 것 같아 한편으로 두렵다.

  우리가 이런 단어들을 많이 쓰고 있다고, 고쳐 보자고 말하는 것이 쉽지 않다. “아니 그런데 우리 이렇게 잘못된 것 같지 않아?” 묻는 기분이 든다는 이유도 있지만, ‘내’가 자주 쓰는 어휘를 ‘우리’가 자주 쓰는 어휘라며, 개인적인 잘못에 당신을 끌어들이는 폭력을 이미 저질러 버렸다는 사실이 그 까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부박한 통찰에 대한 용서를 구하며 하고픈 이야기가 있어 적는다. 우리가 ‘우리’가 아닌 ‘고유한 개인’이 되면 어떨까 하는 물음이다. 또 그 수단으로 개인적인 언어를 택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한병철 작가의 저서 『피로사회』는 긍정성의 과잉이 곧 실패를 낳는다고 말한다. 이 말은 우리가 ‘좋음의 다수’에 의해 피폐해지고 있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다수의 좋음’이 아니다. 여럿이 사용하는 어휘가 곧 좋은 것이라는 착각은 실제로 여럿이 좋음을 느끼게 할 수 없다. 이와 같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에겐 개인적이고 독창적인 언어를 채택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아니, 근데”와 같은 말로 갈음하는 대답, 그리고 이어지는 자기 변호의 말들. 진정 ‘아니’와 ‘근데’가 필요한 때를 위해서라도 앞선 말들을 아낄 필요가 있다. 나중에 정말 ‘아니’가 필요한 순간에 우리는 ‘아니, 아니’라고 말하게 되는 불상사를 마주할지도 모른다.

  언어란 정확한 자리에 놓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는 말을 덧붙이고 싶다. 필요한 순간에 드물게 말해지는 ‘아니’, ‘근데’라는 말이 고유성을 침범하는 부정에 대한 부정의 힘을 보여 줄 것이다. 그 순간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이미 익숙한 반대의 말을 다시 생각해 보자고 다시금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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