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의 거름을 먹고 자란 우리는 중력에 종속돼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당신은 하늘이 드러내는 초월성을 느낀 적 있는가? 우리는 대개 추상적인 것들에 쉽게 마음을 뺏기곤 한다. 가령 사랑, 꿈, 아름다움··· 유미주의를 노래하는 일종의 환영들은 우주 저편의 세계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 나는 하늘을 탐닉하고 싶다. 하늘이 선사하는 무한의 지평선 속에 헤엄치며 숨을 쉬는 것이다.

  고등학교 3학년, 입시를 향해 발버둥치는 나는, 하늘을 보며 하교하는 것을 참 좋아했다. 유화로 그린 듯 붉게 물든 노을빛이 초연히 내려앉는 시점. 그 어느 것에도 영향받지 않는 모습에 매혹당했다. 자유로이 날아가는 새와 솜사탕 같은 수많은 구름 무리들은 제 갈 길 가며 서로의 등을 밀어주고 있었다.

  나의 해방감은 그곳에 있었고 나를 둘러싼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드라마나 애니메이션에서는 어떤 캐릭터가 손을 뻗어 하늘에 닿고 싶어하는 동작은 종종 나온다. 닿을 수 없기에 하늘은 고독하고 거룩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하늘은 나에게 모종의 위안을 제공한다. 비로소 미지의 것과 입맞춤하며 마음속에 쌓인 쓸쓸함과 외로움을 승화시키는 것이다.

  하늘은 우리를 덮고 있고, 그가 지닌 것들은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킨다. 비가 오면 기분이 가라앉고 해가 쨍쨍히 뜨면 알 수 없는 에너지가 솟는다. 우리는 자연의 지배하에 자유를 실현한다. 또 다른 장면이다. 비행기를 타고 올라가면 끝없는 연기의 향연이 보인다. 파노라마는 반복된 장면만 송출하고 이내 우리의 시선은 아래로 땅과 얼마만큼 멀어졌는지 가늠하기 시작한다. 이때 우리는 하늘의 평온함을 느끼며 각자의 자유를 즐긴다. 

  이러한 이중적 이미지는 하늘이 우리를 담고 있는 것이 일종의 당위성이며 전제라는 것을 보여준다. 두려워하며 즐기는 것이다. 바다도 그렇지 아니한가. 바다의 깊이와 종결을 가늠할 수 없다는 공포, 그러나 고요히 일렁이는 물결과 부서지는 파도 속 누리는 휴식. 심지어 직접 물속으로 뛰어들거나 서핑과 같은 격렬한 액티비티를 즐긴다.

  신체로 이어지는 활동을 통해 추상적인 것은 관념적 이미지라는 틀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결국 우리의 삶 속에 파고드는 미(美)는 나에게 하늘을 사랑할 용기를 준다. 기후와 식물, 낮과 밤, 태양과 별, 지구와 우주. 이 모든 것을 관할하는 하늘 아래서 사랑을 배운다.

  필자는 이렇게 땅과 사람과 하늘을 사랑하며 산다. 당신의 ‘하늘’은 어디에서 오는가? 요소는 추상적인 이미지로부터 오지 않을 수 있다. 당연하게도 이 글은 개인의 경험을 비롯해 작성하는 글이기 때문이다. 다만 사람은 공허와 외로움을 지니며 살아간다. 우리는 위로받기에 합당한 존재로 슬픔의 이유는 무언의 긍정으로 침묵할 수 있다. 그러니 우리는 어딘가에 숨통을 만들어야 한다. 그게 깊은 심해 속이든 너른 들판이든 고도의 상공이든지, 고양이든 강아지든 사람이든지 상관없이 말이다.

저작권자 © 숭대시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