밧줄에 묶인 코끼리 이야기부터 시작하면 어떨까요? 코끼리는 집채만큼 큰 몸뚱이를 갖게 된 후에도 결코 조련사의 조그만 밧줄에서 벗어날 엄두도 내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유는 조련사가 어린 코끼리를 밧줄에 단단히 묶은 후에, 코끼리가 밧줄에서 벗어나려 할 때마다 모진 채찍질을 가한 결과, 어른이 된 후에도 그 고통의 기억 때문에 감히 조련사의 밧줄에서 벗어날 생각을 못한다는 건데요.

  심윤경의 「피아니스트」에 등장하는 수영이 제게는 밧줄에 묶인 코끼리처럼 보입니다. 부유한 부모님을 두고, 미국 뉴욕주 변호사 자격증까지 갖춘 수영은 “깜짝 놀랄 만한 사례비”를 치르고, 연봉 10억의 펀드매니저와 소개팅을 하고 있네요. “계약시의 유의조항”을 나누는 것과 같은 딱딱한 대화를 나누면서도, 수영은 앞으로도 그 남자를 계속 만날 것이며, 어쩌면 결혼까지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소개팅을 마친 수영은 고작 1년 정도를 다닌 영대초의 담임이었던 주정숙 선생님의 정년퇴임 파티에 갑니다. 그 학교는 최상류층의 삶만을 살아온 수영에게는 이탈에 해당하는 공간입니다. 본래 서울의 유명짜한 사립학교에 다니던 수영은 아버지의 사업이 망하자, 인천의 바닷가 언덕바지에 있는 영대초에 전학을 간 것입니다. 다시 만난 동창들 앞에서 수영은 “어물어물한 웃음”을 지으며, 이질감만을 느끼는데요. 결국 수영은 주정숙 선생님의 퇴임 파티에 오겠다고 생각한 것은 시간 낭비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수영도 한때는 영대초를, 그리고 그곳의 사람들을 좋아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주정숙 선생님은 합창을 통해서 아이들을 성장시킨다는 독특한 교육관을 지니고 있었는데요. 예중 진학을 목표로 오랫동안 피아노 레슨을 받아온 수영은, “인천 변두리 초등학교의 낡은 업라이트 피아노” 반주는 당연히 자신의 몫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주정숙 선생님은 수영이 아닌 “생선가게 집 더벅머리” 영찬에게 피아노 반주를 맡깁니다. 그런데 수영의 무시와 달리, 영찬의 손끝에서 나오는 피아노 소리는 수영에게 처음으로 “‘영롱한 소리’라는 표현의 의미”를 깨닫게 해줄 정도로 빼어난 것이었습니다. 합창을 통해, 수영은 결코 오래 머물러서는 안 될 바닷가의 영대초에 매혹되었던 거네요.         

  그러나 수영이 “돌아가야 할 세계”는 바닷가의 “촌스러운 학교”가 아니라 아이들이 악기와 하키스틱을 들고 다니는 서울의 사립초등학교입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수영의 아버지는 재기에 성공하고, 본래의 세계로 돌아간 수영은 “성공한 사업가 집안의 딸들은 예술을 하는 거”라는 부모님의 뜻에 따라 예중에 진학하여 피아니스트의 꿈을 키워갑니다. 그러나 콩쿠르 날 무대에 선 수영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오줌 얼룩만을 드레스에 남기고 무대에서 내려옵니다. 어둠에 쌓인 긴 복도를 지났을 때, 수영이 마주한 것은 자신의 귓가를 후려친 아빠의 꽃다발입니다. 아빠의 꽃다발은 자신의 발목에 묶인 밧줄에서 벗어날 뻔한 수영이라는 어린 코끼리에게 가해진 조련사의 채찍질에 해당하는 것이겠죠. 이후 수영은 미국에 가서 변호사 자격증을 따냄으로써, 자신이 “속한 세계의 일원으로 남는 것에 성공”합니다.    

  이런 수영과 대비되는 존재가 바로 영찬입니다. 부모님이 정해 놓은 화려한 세계에 머물기 위해 수영이 몸부림을 치는 동안, 영찬은 영대시장에 남아 생선가게를 하고, 꼬치를 굽고, 조미료 범벅 참새떡볶이를 만들며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나갑니다. 그 세계의 중심에는 여전히 피아노가 있습니다. 영찬은 지금 낡은 정미소를 개조한 ‘영대정미소’에서, 그 잘난 수영이를 앞에 두고 업라이트 피아노를 연주합니다. 이 순간 수영은 자신이 비린내 가득한 이곳까지 온 이유가, 어쩌면 “영찬의 피아노를 다시 들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음을 어렴풋이 깨닫는군요. 영찬의 손끝에서 히사이시 조의 「바다가 보이는 마을」의 영롱한 멜로디가 흘러나올 때, 수영은 비로소 자신의 어둠이 “해방”됨을 느낍니다. 어른 코끼리가 된 수영에게도 자신을 묶어온 밧줄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처음으로 개시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수영은 결코 그 밧줄로부터 벗어나지 않습니다. 아니 못 합니다. 수영은 영찬의 손끝에서 흘러 나오는 소리를 따라갔다가는 자신의 “모든 것이 붕괴되어버리고 말 것”이라는 두려움을 느끼며, 영찬이 피아노를 연주하는 영대시장은 어디까지나 “세계의 바깥”이며, 그렇기에 그곳과 영찬의 영롱한 피아노 소리는 영원히 “어둠 속에 봉인”되어야만 한다고 여기니까요.  

  이런 수영은 고액의 연봉과 탐나는 명품으로 채워진 ‘화려한 감옥’에 갇혀 있는 죄수는 아닐까요? 수영은 자신에게 주어진 취향, 가치관, 야망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은(못한) 채 살아갈 뿐입니다. 그렇기에 누구를 만나 결혼하고, 어떤 옷차림을 하고, 어디에 사는지는 모두 ‘조련사’의 뜻에 따른 것이겠죠. 심윤경의 「피아니스트」는 수영과 영찬이라는 두 명의 피아니스트를 무대에 세운 후에, 누구의 연주에 우리가 귀를 기울여야 할지를 묻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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