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수의 「미래의 조각」(『문학동네』, 2023년 가을호)은 충격적인 사건으로 시작되는군요. 주인공인 ‘나’는 어머니가 고농축 살충제를 먹고 자살을 시도하여 중환자실에 누워 있다는 연락을 받습니다. 평소 자신의 어머니가 “제일의 낙관주의자”라고 여겨왔기에 이러한 소식은 더 충격적일 수밖에 없는데요.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도, 어머니는 낙관주의자로서의 면모를 아낌없이 보여주었을 뿐입니다.  

  그 당시 뉴스에서는 자율 주행 전기차와 관련된 주식의 계속되는 폭등이 보도되고 있었는데요. 그 뉴스를 보던 어머니는 “조금만 있으면 운전면허도 필요 없어질 것 같다”며, “그때 되면 나 차 한 대 사줘. 차 타고 유럽 가게”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늘 미래가 금방이라도 들이닥칠 것”처럼 말하곤 했던 어머니는, 면허가 없지만 자율 주행 자동차가 나오면 혼자 차를 타고 돌아다닐 수 있게 될 것이고, 그때가 되면 통일도 되어 있을 테니 북한을 거쳐 유럽까지 갈 수 있지 않겠냐고 생각한 것입니다. 어머니는 그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늘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화성으로 이주해 도시를 건설할 것이며, 얼마 지나지 않아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환경오염과 기후 위기도 모두 해결될 것이고……”라며 미래에 대한 기대로 가득했습니다. 이렇게 어머니가 그리는 미래의 세상은 “언제나 지금보다 나은 모습”이었고, 그렇기에 어머니에게 신앙이 있다면, 그것은 “미래”였던 것입니다. 

  이런 ‘제일의 낙관주의자’인 어머니가 자살을 시도했으니, ‘내’가 받은 충격은 대단한 것일 수밖에 없는데요. ‘나’는 어머니가 “죽음 또한 미래에 있는 것이니, 미래에 있는 다른 모든 것들처럼 그것도 좋은 것이리라고 생각했을지 모르겠다.”며, 평소 어머니의 낙관적인 모습에 비추어 어머니의 자살 시도를 합리화하려고까지 합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나는 나의 지난 삶에 죄를 지었다.”라는 유서까지 남겼기에, 이러한 합리화가 성공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항상 장밋빛 미래를 믿어 의심치 않는 어머니가,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는 ‘지난 삶’은 어떤 것일까요? 어머니가 늘 되새김질해 온 과거는 장밋빛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나 머네요. 어머니는 시골 중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하여 아버지를 만났고, 십대에 아들을 낳고 이후에도 또 아들을 낳았으며, 결국에는 원하지 않는 삶을 체념하듯 받아들이며 살아온 것입니다. 어머니는 자식들을 모두 성장시킨 후에는, ‘지난 삶’을 보상이라도 받겠다는 듯이 과거의 모든 ‘원인’인 아버지와 맹렬하게 싸워왔네요. 그 싸움은 너무나도 맹렬하여 형과 ‘나’는 결국 아버지와 어머니를 따로 살게까지 했습니다. 

  어머니는 중환자실에서 집으로 돌아왔지만, 안타깝게도 고농축 살충제는 어머니의 성대를 파괴하여 그녀로부터 목소리를 앗아가 버리고 말았네요. 이후 어머니는 소설 비슷한 이야기를 쓰기 시작합니다. ‘나’는 어머니의 글이 “자기 치유의 행위로서 지나온 삶을 하나하나 되짚어보는 일종의 회고록”일 거라고 예상하지만, 실제는 전혀 다르네요. 과거 시제와 현재 시제, 미래 시제가 혼재되어 있는 그 글에서, 어머니는 대학까지 졸업하고 무역회사에 들어가 전세계를 돌아다니거나, 생물학자가 되어 아프리카와 호주를 돌아다니며 연구를 합니다. 또는 아버지와 달리 다정하고 가정적인 남자를 만나 두 딸을 낳아 기르고, 그 딸들은 무역회사를 다니거나 동물을 연구하며 전세계를 돌아다니네요. 어머니의 소설은 “과거 속의 미래”를 재구성하는 일이자, 지나간 삶을 미래의 가능성으로 치유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요.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어머니는 이제 ‘미래’만큼이나 ‘과거’의 희망도 중요하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겠지요. 미래가 ‘다가오지 않은 것’처럼 과거도 ‘다가갈 수 없는 것’이라면, 과거 역시 의지가 개입될 수 있는 미래가 되지 말란 법은 없으니까요. 

  이제 ‘미래’만을 신앙하던 어머니에게는 새로운 우주가 열린 것입니다. 이런 어머니를 보며, ‘나’는 어머니에게 선물을 준비합니다. 그것은 “언제나 현재의 좋은 것을 손에 잡기보다 미래에 도래할 좋은 것을 기다리는 일을 택하는 사람”이었던 어머니에게 ‘현재의 좋은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나’는 어머니와 함께 공원을 산책하며, 소풍 나온 가족들, 개를 데리고 산책로를 걷는 사람들, 선 캡을 쓰고 수다를 떠는 여자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풍경들은 “대단히 아름답지는 않지만 평화로운” 것임에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늘 어머니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게 내버려 두었던 현재마저 자신의 손에 담도록 하는 일에 해당하는 것이겠죠. 이렇게 해서 어머니는 ”모두 괜찮을 거야“라고 말하는 사람에서 ”모두 괜찮다“라고 말하는 ‘진짜 낙관주의자’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작가 정영수는 ”이것은 내가 하는 또하나의 ‘구성’이다.“라는 문장을 덧보태, 이 모든 것이 메타픽션(metafiction)일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습니다. 정영수가 그려놓은 미래의 조각에는 과거와 현재는 물론이고, 소설의 새로운 가능성도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작권자 © 숭대시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