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림의 시 「갈대」(1955)에서 갈대는 언젠가부터 자신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그리고는 자기를 흔드는 것이 바람도 달빛도 아닌, 그저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깨닫는데요. 갈대는 왜 밤마다 혼자 울어야만 했을까요? 인간인 저로서는 외롭고 고독했기 때문이라고 감히 추측해 봅니다. 모든 생명체는 독립된 유기체로서 개체의 벽에 갇혀 있기에, 늘 혼자라는 고독과 긴장 속에서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렇기에 인간은 맹렬하게 불연속성에서 벗어나 다른 대상과 연결되기를 원하는데요. 다행히 인간은 축복처럼 불연속성에서 벗어나 가끔 세상과 연속성을 회복하기도 합니다. 조르주 바타유에 따르면, 에로티즘, 신성 체험, 죽음 등이 바로 그 지복의 순간에 해당합니다. 

  인간이 개체라는 벽에서 벗어나는 순간으로는 아마 사랑도 들 수 있을텐데요. 누군가를 사랑할 때, 우리는 ‘나’라는 장벽을 부수고 ‘너’와 하나가 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인간은 연속성을 열망하는 것만큼이나 연속성을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연속성을 회복하는 순간은 자아라는 애지중지해 온 개체의 벽이 부서지는 순간이기도 하니까요. 문진영의 「덜 박힌 못」(『자음과모음』, 2023년 가을호)은 인간이 개체성을 벗어나 세상과 연속되기를 바라면서, 동시에 개체의 벽 안에 머물기를 바라는 모순적인 면모를 물 흐르듯 잔잔하게 보여주는 만만치 않은 작품입니다. 

  처음 혜정은 경호와 사귀는데요, 어느 순간부터 둘의 사이에 경호의 누나인 경신언니가 끼어들게 됩니다. 이후 혜정은 경호보다도 경신언니에게 진한 애정을 느끼는군요. 처음 경호는 40을 넘긴 누나가 부모 대신 자신을 돌보느라 온갖 험한 일을 했으며, 지금은 그 때의 후유증으로 중증의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소개합니다. 그러나 삼계탕집에서 경신언니를 처음 만났을 때, ‘중증의 우울증자’이자 ‘시어머니보다 더한 시누이’라는 편견과는 달리 경신언니는 “화장조차 필요 없는 미인”이었으며 혜정을 격식 없이 대해 줍니다. 혜정과 경신언니는 처음부터 어찌나 죽이 잘 맞았는지, 첫 만남부터 경호의 집에서 밤새 술을 먹고, 그 다음 날에는 해장라면을 먹어가며 저녁까지 함께 시간을 보낼 정도였습니다. 

  나중에 혜정은 경호 없이 단둘이서 경신언니를 만나기 시작하고, 혜정은 경신언니를 따라 처음으로 클럽에 가기도 합니다. 혜정은 경신언니 곁에 있으면, “용감한 버전의 내”가 될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해방감”을 느꼈던 것입니다. 이 해방감이야말로 얌전하고 성실한 공무원으로 살아가는 혜정이 자기라는 개체의 벽을 허물고, 세상과 연속된 존재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요?

  혜정이 이러한 해방감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경신언니가 가진 독특한 힘 때문입니다. 혜정은 자신이 경신언니를 좋아하는 이유가, “벽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말하는군요. 이 말을 듣고 경호는 “벽이 없다는 건 동시에 보호막이 없다는 거야. 누나는 상대방이 누구든지 전력을 다한다고, 자기 패를 다 보여준다고.”라고 대답하는데요. 경신 언니는 보통 사람보다 자아라는 벽이 약한 사람이었으며, 그렇기에 쉽게 타인과 연결될 수 있었던 겁니다. 경호의 이 말을 듣고 혜정은 자신만만하게 “언니가 자신의 모든 패를 다 보여준다면 나도 내 패를 다 보여줄 거야.”라고 다짐하는군요. 개체의 벽을 넘어서겠다고 자신하는 혜정은, 어쩌면 경신언니를 진짜 사랑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과연 혜정은 언제까지 ‘중증 우울증자’에 직업도 없이 동생에 얹혀사는 불혹의 경신언니를 사랑할 수 있을까요? 곧 시험의 날은 다가옵니다. 그 날 우울증 약의 처방을 바꾸고 술까지 거듭 마신 경신언니는, 자주 가던 칵테일 바에서 내내 잠만 잡니다. 자신에게 기댄 채 쿨쿨 잠자는 경신언니를 보며, 혜정은 “한 생의 무게가 고스란히 나를 덮쳐오는 느낌, 지구보다 더 무거”운 느낌을 받습니다. 그러면서 머리로는 “이 사람을 지켜주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경신 언니로부터 도망치고 맙니다. ‘벽이 없는 사람’이었던 경신언니가 진짜로 자신을 완전히 개방해 혜정에게 다가왔을 때, 혜정은 지구보다도 무겁게 느껴지는 언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것입니다. 사랑이란 결코 만만한게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연속성을 바라면서 동시에 회피하는 혜정의 마음은 변함이 없습니다. 6년 만에 경신 언니에게 연락이 오자, 처음 혜정은 경신 언니의 연락을 외면하지만 곧 “그렇구나, 잘됐네, ㅋㅋㅋ”와 같은 간단한 반응을 남기기 시작하는군요. 그러면서 “그게 싫지 않았다. 다시 연결되고 싶었던 것 같다.”라고 생각합니다. 경신 언니가 만나자는 얘기를 해줬을 때도, 혜정은 “걱정스러우면서도 기뻤다.”는 모순적인 감정을 느낍니다. 그리고 이번에도 짧은 에피소드만을 남긴 채 경신 언니와 헤어집니다. 그리고 혜정은 깨닫습니다. “우리가 헤어진 건 우리가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었다.”는 걸요. ‘우리가 우리 자신이기’를 멈추고 타인과 하나가 되기에, “참새만큼 가벼웠던” 혜정의 마음은 턱없이 부족했나 봅니다. 연속성을 바라면서 동시에 회피하는 혜정의 모순된 마음은, 아마도 혜정의 것만은 아닌 우리 모두의 마음이기도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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