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사라는 칭호는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 봤을 것이다. 열사란 민족,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을 일컫는 칭호이다. 우리학교에도 열사라 불리는 이들이 있다. 각기 다른 시대, 다른 삶을 살았지만, 죽음으로써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된 분들이다. 교내를 지나가다가 열사를 기리기 위해 설치해 놓은 분향소를 많은 학생들이 봤을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 학생들이 그들이 누구인지, 어떤 일을 했는지 자세히 알지 못하며 크게 관심을 갖지 않는다.
이번 호를 통해 많은 학생들이 우리학교의 열사라 불리는 분들을 알고 그들을 다시금 떠올릴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김창섭 열사

(1939 ~ 1960) 

김창섭 열사(당시 사학·4)는 전북 금산에서 출생, 1956년에 대전대학(현 한남대학교) 성문학과에 입학했고 1959년에 본교 3학년에 편입했다.

1960년 4월 19일,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에 길이 남을 혁명이 일어난 날이다. 이날 대한민국의 수많은 사람들은 독재를 무너뜨리고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으로 피를 흘렸다. 당시 본교에 재학중이던김열사도 민주주의를 얻기 위해 경무대를 향하던 중 경찰의 무차별 사격에 허리에 관통상을 입고 그 자리에서 순국했다. 김 열사의 장례는 같은 해 4월22일 유족을 비롯한 많은 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과학관(현 베어드홀) 앞에서 학교장으로 거행됐다. 그리고 1960년 6월에는 고 김창섭동지순국기념사업회가 당시 학장 김성락 박사, 이사장 김형남 등이 고문으로 참여한 가운데 재학생들의 발의에 의해 발족, 교정에 기념비를 세웠다. 2년 뒤인 1962년 4·19 두 돌 기념식전에서 김창섭 열사는건국포장을 받았다.

 

 

 

 

 

 

박래전 열사
(1963~1988)

“광주는 살아 있다. 청년학도여, 역사가 부른다. 군사파쇼 타도하자.”이는 1988년 6월 4일, 박래전 열사(당시 국문·4)가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분신하기 전 외친 말이다.

박 열사는 1963년 경기도 화성출신으로 본교 국어국문학과에 82학번으로 입학했다. 1988년 제20대 인문대 학생회장으로 일했다. 그리고 그해 6월 학생회관 옥상에서 온 몸에 신나를 뿌리고 구호를 외친 후 분신했다. 즉시 한강성심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전신 80%가 3도 화상을 입는 최악의 상황에서 신음하다 이틀 후인 6일 오후 12시에 폐혈증으로 사망했다. 박 열사는 유서를 통해 광주학살 원흉 처단과 민주주의 쟁취를 전국 백만학도에게 촉구했다. 그의 사망일인 6일 저녁 대책위원회가 열려 장례 일정이 결정되고 장례위원회가 구성됐다. 장례위원 고문으로 김대중·김영삼등당시 정치계 대형 인사들이 참여했다. 사망한 다음날 그의 시신은 본교 학생회관에 마련된 빈소에 안치됐다가 12일‘민중해방열사 고 박래전 민주국민장’으로 마석 모란공원에 시신을 안장했다. 이후 박래전 열사의 뜻을 계승하기 위해‘박래전기념사업회 발기인대회’가 유가족 및 학생 15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9월 2일 교내에서 열렸다. 기념사업회는 현재까지 고인의 뜻을 기리고, 이를 널리 전파하는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특히 기념사업회는 1994년 4월 7일, 분신 6주기에 때 맞춰 숭실인 1인1000원모금운동을 통해‘박래전기념비’를 도서관 옆에 건립했다.

 

 

 

 

 

 

박현민 열사
(1967~1992)

박현민 열사는 1967년 부산출생으로 본교 영어영문학과에 1986년에 입학했다. 그는 1987년 6월 항쟁 당시 본교 교정 밖에서 시위 도중 3도 화상을 입는 등 학생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1988년에는 기독학생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박 열사는 군에서 얻은 병으로 제대한 후‘일반휴학 후 군입대하여 휴학기간이 초과됐다.’는 이유로 제적당했다. 이후 그는‘미등록 제적생 복적 대책위’를 구성하고 91년 2학기까지 1년 여 동안 복적 투쟁을 전개했다. 박현민 열사는 92년 학원 자주 투쟁에서 미등록 제적생 전원 복적 요구와 비민주적 학사행정의 개선을 위해 적극 투쟁했다. 결국 1992년 4월 2일 과로로 쓰러져 입원했다. 그리고 40여 일의 투병 끝에 운명했다. 박 열사의 장례는 1992년 4월 30일 학생장으로 치러졌다. 그리고 이듬해 6월 제6기 전대협 영웅상을 받았다. 1993년 4월에는 본교 명예복적증서를 수여받고 연구관 옆에 그를 기리기 위한 동상이 건립됐다.

 

 

 

 

엄성준 열사
(1970~2005)

농민운동가 엄성준 열사는 1970년 충남 서산 출생으로 1991년에 본교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엄성준 열사가 농민운동가로 활동하게 된 인연은, 그가 본교 농촌문제연구
회 동아리인‘땅의 사람들’에 입회하면서 생겼다. 그는1996년에는 본교 경상대 학생회장을 역임했고, 그 다음해에는 진천군 농민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그는 졸업 후 매년 농활을 가던 진천으로 가서 직접 농사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농민회 정책실장으로 일하면서 농민운동에 적극적 참여했다. 엄 열사는 2005년 4월 29일 봄농활 준비로 답사 온 학생들을 태우고 마을로 들어가던 중 맞은편에서 중앙선을 넘어 질주해오던 음주 차량을 피하려다, 옆좌석의 학생들을 구하고 본인은 운명했다. 그의 장례는 그 해 5월 2일 애국농민장으로 치러졌으며, 현재 마석 민족민주묘역에 안장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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