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법인 화우 - 박영립(법ㆍ75학번) 변호사



박영립 동문 인터뷰를 하러 가는 길, 기자는 애석하게도 길을 잘못 들어섰다. 약속 시간에 늦는 결례를 범하게 된 상황이었다. 우선 연락을 드렸다. 늦을 것 같다고. 되돌아온 답변은 호탕한 웃음과 “당황하지 말고 천천히 와도 됩니다”라는 말. 아직 대면하지 않았지만 진작에 동문의 인품을 추측할 수 있었다.

성매매 여성, 교도소 인권 등 특히 인권문제에 관심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23살이 되어서야 대학에 들어와 늦은 공부를 시작했었다. 그 때 나를 이곳으로, 공부할 수 있도록 이끈 절대자의 뜻, 즉 나름의 소명의식을 갖게 됐다. 정말 어려운 집안사정으로 늦게 시작한 공부에 “빚진 자의 마음”이라는 것이 있어 더 절실해졌다. 대학시절 좋은 얘기들이 뇌리에 차곡차곡 쌓였다. 이는 자연스럽게 가슴에 스며들었고 싹텄다. 늘 공익을 생각하고, 사회에 환원하며 살아야 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일종의 자기위안 일 수 있다. 나는 업무의 수익성보다는 인권문제에서 얻게 되는 것에 보람과 성취감을 느낀다.

소록도 한센병환자에 대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한일간의 문제였는데 기억이 크게 남으실 것 같습니다.


대한변호사협회에서 인권위원장에 있을 시절 일본 변호사로부터 소록도 한센병 환자들을 도와주려는데 힘이 부치니 도와달라는 요청이 왔다. 그 때 제일 처음 들은 생각은 ‘부끄럽다’였다. 권위정부에 대항했고 민주화에 기여했다고 자부심을 가졌는데 우리는 사회적 소수자인 그들에 대해 논의한 사실조차 없었다.
일본 변호단은 한 시인에게서 받은 편지가 발단이 돼 98년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벌였다. 2001년 5월 구마모토 지방재판소는 이를 위헌으로 판결했고 일본인들은 보상받게 됐다. 이 문제가 우리에게도 돌려진 건 또 하나의 편지로부터 시작됐다. 한 역사가가 한국의 ‘소록도’와 ‘대만’의 문제를 아느냐고 물었고, 일본 변호사들이 한국과 대만 문제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대한변호사협회에서 인권위원장에 있을 시절 일본 변호사로부터 소록도 한센병 환자들을 도와주려는데 힘이 부치니 도와달라는 요청이 왔다. 그 때 제일 처음 들은 생각은 ‘부끄럽다’였다. 권위정부에 대항했고 민주화에 기여했다고 자부심을 가졌는데 우리는 사회적 소수자인 그들에 대해 논의한 사실조차 없었다. 일본 변호단은 한 시인에게서 받은 편지가 발단이 돼 98년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벌였다. 2001년 5월 구마모토 지방재판소는 이를 위헌으로 판결했고 일본인들은 보상받게 됐다. 이 문제가 우리에게도 돌려진 건 또 하나의 편지로부터 시작됐다. 한 역사가가 한국의 ‘소록도’와 ‘대만’의 문제를 아느냐고 물었고, 일본 변호사들이 한국과 대만 문제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2005년 10월 25일 오전 10시 소록도는 기각되고, 10시 30분 대만 승소했다. 우리측은 울음바다가 됐고 대만은 환호성을 질렀다. 일본의 여론이 들끓었다. 우리나라 종묘에서는 대단위 궐기가 있었고 천여명이 모여 항의서를 전달했다. 변호단은 일본대사관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였다. 일본 국회는 법을 개정하며 드디어 배상대상에 소록도를 포함시켰다. 해방 60년, 한일과거사가 변호사 NGO활동에 의해 입법적으로 해결된 첫 사례로 남게 됐다. 법은 통과됐지만 배상문제는 계속해서 해오고 있다. 아직도 진행 중이다.


그럼 이제 학부시절의 얘기를 들어볼까요?


당시 법경대에 수석으로 입학해 장학생이었다. 집안 사정이 안좋았다. 고향에서 올라와 안해본 일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학교를 언제 그만 다닐지 몰랐다. 항상 “이 학기가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다녔다. 모임이든 체육대회든 잘 하지 않더라도 무조건 참석했다. 데모까지도 최선을 다했다. 나에겐 하루하루가 소중했고 시간가는 것이 아까웠다.


1학년 때부터 항상 도서관을 찾았고 종류를 가리지 않고 책을 읽었다. 책을 읽다 사법시험에 대해 알게 됐다. 바로 느낌이 왔다. 사법시험으로 진로를 결정하고 여기에 “전력을 다해 해보겠다”는 뚜렷한 목표가 생겼다.


사법시험을 보기로 결정한 후 고시공부는 학교에서 했다. 매학기 장학금을 타야해서 학점도 놓칠 수 없었다. 때문에 수업을 거의 빠지지 않았고 도서관으로 가서 공부했다. 결과적으론 사법시험에 도움이 됐다.



힘든 시기가 결국엔 지금의 선배님을 있게 한 것 같습니다.


힘든시절이 나의 자양분이 됐다. 세상엔 공짜가 없다. 이건 자연법칙이다. 힘든 과정을 겪어왔기에 다른 무엇보다 공부가 쉽다는 걸 알았고 즐겁게 공부할 수 있었다. 힘들때마다 서울에 올라와 겪었던 숱한 고생들을 떠올리며 이겨냈다.


얼마 전에 자카르타에 갔었다. 그곳 사람들은 4계절이 뚜렷하지 않아 나이를 정확히 모른다고 한다. 또한 나무에 나이테도 없단다. 4계절의 변화가 있어야 나무는 나이테를 만들고 더욱 단단해 진다. 무쇠도 용광로에 달궈야 더욱 단단해지지 않는가. 못도 망치에 부딪혀야 제 역할을 해내지 않던가. 고난도 자연의 섭리다. 더 나을 수 있는, 성숙해질 수 잇는, 나를 단련할 수 있는 필수 과정인 셈이다.



법대 동문회장이시기에 로스쿨에 대해서 여쭙고 싶습니다.


로스쿨의 실패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모교에 애정을 갖고 있고 법률고문의 직에 있고, 법대 동문회장인 사람으로서 아쉽게 생각한다. 지금은 준비에 철저하지 못한 데 반성하고 최선을 찾아야 할 때다. 도약의 중대한 고비다. 두 번의 실패가 없도록 로스쿨 유치에 다시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제 과거에 살아서는 안된다. 현실에 안주한다는 것은 낙오와 도태를 의미한다. 남들 이상으로 걸어야 한다. 우리의 현주소를 인정하자. 지금도 늦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준비하면 10년 20년 후엔 더 성장해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후배들에게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검정고시를 준비할 때 주변에서 다들 말렸다. 집안 사정도 안좋은데 그러고 있을 때냐고. 또 얼마나 할 수 있겠냐고. 자신이 선택해 한 번 사는 인생이다. 공부하지 않으면 정말 후회할 것 같았다. 그렇게 시작했다.


또한 무슨 일을 하든 항상 그 분야의 최고가 궁금했고 그들을 눈여겨 봤다. 동대문에서 점원으로 일할 당시 동대문 시장의 사장이 되고 싶었다. 그 때 동대문 시장의 사장들은 세무서원을 제일 무서워했다. 우리집 사장만은 그러지 않더라. 이유를 물어봤더니 상고를 나와 세무관리를 잘했기 때문에 아무렇지 않단다. 동대문 시장의 훌륭한 사장이 되려면 경리학원을 다녀야겠다고 생각했다. 경리학원을 구하던 중 검정고시를 알게 됐고 결국 검정고시학원을 다녔다. 대학생이 된 후 도서관에 다녔던 것 이유 중의 하나도 바로 그거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은 도서관을 잘 다니기 때문이었다.


생각은 행동이 되고 행동은 습관을 만들고 습관은 미래의 성공을 만든다. 교육은 좋은 습관을 익혀나가는 과정이다. 이는 학창시절에만 할 수 있는 것이다. 실패 속에서 배울 줄 아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박영립 동문은 초등학교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가장으로서 집안의 짐을 고스란히 떠맡아야 했다. 서울로 올라와 온갖 궂은 일을 다했고, 결국 검정고시로 대학에 들어올 수 있었다. 그 시절을 떠올리는 동문의 눈엔 살짝 물기가 어리는 듯도 했다. ‘아르바이트 구함’이라는 전단지를 보면 가슴이 짠해진다고 말하는 박 동문. 그 옛날 일거리 구하기도 힘들었던 시절보다야 그래도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지금에 가슴이 울리는 것이리라. 아직도 꿈인지 생신지 손을 꼬집어 본다고 말하는 박영립 동문에게서는 인간적인 따뜻함이, 냄새가, 그리움이 애잔하게 풍겨나고 있었다.

저작권자 © 숭대시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