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여성동문회장 겸 성결대 사회복지대학원장 이영실(사회사업·73) 동문

지난 9월, 숭실 출신 여성들이 뭉쳤다. ‘여성동문회’의 총회를 위해서다. 전체 동문에서 차지하는 여성 동문의 비율이 점차 늘어감에 따라 여성 동문회의 필요성이 제기됐고, 올해 첫 걸음을 내딛게 된 것이다. 앞으로 정해진 임기 동안 여성동문회를 이끌어갈 역사적인 초대 여성동문회장으로 선출된 이영실(사회사업·73) 동문을 만나보았다.


여성들이여, 남성 위주의 사회에 개의치 말고 도전하라

“따르르르릉- 따르르르릉-”
여기저기서 쉴새없이 울려대는 전화벨 소리를 통해 이 동문이 얼마나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직업은 교수. 현재 성결대학교 사회복지대학원장직을 맡고 있다. 강단에 선 지도 어언 23년이 지나 배테랑 교수가 됐다. 23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건만 그녀가 교수가 되던 그 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한국 사회는 성별 앞에 평등이란 없다. 아무리 실력, 열정으로 접근하더라도 여전히 채용되는 여성의 수는 적고, 남성의 수는 많은 것이 현실이다. 교수 사회도 마찬가지다. 여교수의 비율이 20%라면 남교수는 70, 80% 정도를 차지한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 벽을 뚫고 23년 전, 교수가 됐다. 그녀는 말한다. “ 내가 교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실력과 열정, 학생들이 나 이상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학생들의 능력을 발전시키겠다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 아닐까.” 덧붙여 여학생들에게 똑똑히 당부한다. “남자 위주의 한국 사회에 개의치 말고 도전하라. 그러면 기회가 오고, 그 기회가 오면 지체 없이 잡아라.”


원조 쓰리(Three) ‘숭(崇)’ 출신 교수

그녀는 학사·석사·박사, 이 세 학위를 모두 ‘숭실’에서 취득했다. 그랬던 만큼 ‘숭실’에 대한 애착도 누구보다 강했고, 이 곳에서 얻은 소중한 인연과 추억, 경험들을 후배들에게 고스란히 물려주고 싶었으리라. 1985년부터 3년간 그녀의 소원대로 ‘숭실’의 교단에 설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부군은 현재 우리학교 IT대학장직을 맡고 있는 유재우 교수로, 부부 교수는 잘 채용하지 않는 풍토로 인해 결국 ‘숭실’이 아닌 ‘성결대’를 선택해야 했다. ‘성결대’는 여러 모로 그녀의 모교 ‘숭실’과 닮은 점이 많았다. 기독교 대학이라는 정체성부터 적은 수의 학생 규모를 가진 작은 학교이면서도 발전 가능성이 내재돼 있는 것까지. 이런 점들이 그녀의 선택에 많은 영향을 알게 모르게 끼쳤으리라.

그렇게 그녀는 성결대 교수 채용에 지원을 했고, 당시 정신보건 분야는 우리학교 외에는 전무했기에 상대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었다. 게다가 실무경험과 박사학위 둘 다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은 까닭에 그 두 가지를 모두 갖추고 있던 그녀에게는 더 없이 좋은 기회였다.


교정에 앉아 통기타 치던 그 시절, 대학의 낭만

지금으로부터 약 30년 전 그녀가 학생 신분으로 ‘숭실’교정을 거닐던 그 때 그 시절에는 양희은·서유석 등 통기타 가수가 유명했고, 인기가 많았다. 그 시절 그녀는 지금과는 조금 다른 풍경의 교정에 앉아 기타 하나로 친구들과 정서적 교감을 나눴다. 의식 있는 노래를 함께 부르면서 서로의 꿈도 나누고, 미래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고, 국가를 논했던, 대학생으로서의 낭만을 즐기던 그때가 그립다는 그녀다. ‘우리’라는 정서적 유대를 공유했던 그녀의 대학시절과는 달리 지금은 너무 이기주의와 개인주의에 빠져 있는 듯한 인상을 많이 받는다고.


삶의 방향을 제시해주셨던 은사님들

누구나 인생을 살아가면서 한 번쯤은 내 삶의 방향을 바꿔놓을 만한 은사를 한두 분 정도 만나곤 한다. 그녀는 대학에서 그런 은사를 만났다. 지금은 작고하신 故어윤배 전 총장과 故조성경 교수가 그들이다. 故조 교수는 교수이자 사회복지사로서 그녀에게 인간관계에 대해 많은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한 영향으로 미국에서 인간관계론을 배워 강의를 하기도 했다. 故어 전 총장 또한 그녀의 기억 속에는 감사한 분이다. 정치·조직·리더적 요소들과 기독교적 바탕에서 학생들로 하여금 꿈을 꾸고, 키워나가는 방법을 가르쳐주셨던 까닭이다.

석사과정을 밟을 때였다. 한 번은 故어 전 총장이 시험문제로 ‘여의도만한 땅이 있고, 돈은 원하는 만큼 준다. 이를 가지고 한국에 이상적인 복지 사회를 건설해보라.’는 서술형 문제를 냈다. 장장 2시간 30분 동안 신나게 10페이지 넘게 답을 적어 내려갔다. 그녀는 배운 전문성과 학생으로서의 창의성을 토대로 적어보라는 교수님의 의도가 담긴 시험 문제였던 것 같다고 회상한다. 이는 당시 그녀에게 ‘어디로 나아가야 겠다.’는 비전에 대한 방향성과 도전을 줬던 평생 잊지 못할 시험 문제다.


너와 내가 나누는 것, Sharing

전공분야 특성상 그녀는 학부 때부터 인간관계에 대한 훈련을 많이 받았다. 그 중에서도 너와 내가 나누는 것, 즉 주변 사람들과 서로에 대해 Sharing(나눔)을 할 수 있는 기회도 다른 사람에 비해 많이 주어졌다. 그녀가 귀에 못 박히도록 들었던 가르침은 “나 자신이 먼저 자아실현을 이루면 다른 사람에게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배움은 그녀가 교수인 지금, 다시 그녀의 학생들에게로 이어지고 있다. 강의 시간마다 그녀는 학생들이 ‘나’, ‘우리’라는 정체성을 일깨울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 노력한단다. 한번은 학생들을 데리고 설악산에 가서 인간관계로 인해 발생된 문제들, 이성과의 문제, 개인적인 문제 등을 Sharing(나눔)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다. 그곳에서 서로 진실된 속 마음을 나누고, 눈물을 쏟아내며 한층 가까워질 수 있었단다.


나는야 ‘불나비 소녀’

강의 때는 엄한 교수로, 평소 때는 엄마처럼 혹은 언니처럼 친근하게 학생들을 대하는 그녀의 별명은 ‘불나비 소녀’다. 학과 워크샵에 갔을때 ‘불나비’라는 노래를 부른 이후로 그녀를 줄기차게 쫓아다닌 별명이다. 이제는 워크샵만 가면 학생들이 먼저 ‘불나비’를 외쳐대고, 그 외침에 그녀 또한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어 한 번씩 불러주는 것이 의례적인 워크샵 속 작은 행사가 됐다고. 이렇듯 세월이 지나도 학생들과 눈높이를 맞추려는 그녀의 노력은 변함이 없다.


학생들이 내 유일한 재산

비록 그녀 명의로 된 재산은 하나 없지만, 그것보다 더 큰 재산이 그녀에게는 있었다. 어떤 값으로도 매길 수 없는 그런 재산말이다. 그녀는 입버릇처럼 말하곤 한다. 학생들이 내 유일한 재산이라고. 인터뷰 도중 한 학생이 교수실로 들어왔다. 그러자 그녀는 말했다. “지금 5억짜리 학생이 들어오네요.” 이렇듯 그녀는 학생들을 성장시키는 것이 본인의 귀중한 재산이라고 굳게 믿는다. 얼마 전, 우리학교에서는 사회복지교육 40주년 행사가 큰 규모로 열렸다. 이 자리에는 그녀뿐만 아니라 20년 전 그녀가 우리학교 강단에서 가르친 학생들도 참석했다. 어느덧 나이를 먹어 40대가 된 제자들이 “교수님의 가르침 덕분에 변화됐습니다.”라고 말했을 때의 기분은 말로 설명할 수 없다던 그녀의 표정 속에서 학생들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큰 지 가늠해볼 수 있었다. 그녀에게는 여전히 꿈이 있다. 학생들에게 꿈을 주고, 동기부여를 해줌으로써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있는 열정과 창의성, 끊임없는 탐구력을 가진 지도자로 성장시키는 게 바로 그것이다.


전 동문이 이끌어가는 여성동문회

초대 여성동문회장이 된 이상, 그녀로부터 여성동문회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전임 총동문회장이었던 이덕실(법학·66) 동문과 지난 3월부터 만남을 가지면서 우리학교에도 여성 졸업생이 점차 증가함에 따라 여성동문회가 필요하지 않겠느냐는 이야기를 나눴단다. 그렇게 여성동문회가 창립하게 됐다.

동문회 하면 떠오르는 인식들이 있다. 흔히들 이사진들 몇 명이서만 친하고 나머지는 잘 알지 못한다는 것과 매번 돈만 내라고 하는 집단으로 인식된다. 그녀는 이런 동문회의 인식을 바꾸고 싶었단다. 그렇다면 그녀가 꿈꾸는 여성동문회는 어떤 모습일까. 간단하다. 현재 사회에 진출한 동문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대학 때 가지고 있었던 그들의 잠재력을 최대로 살려주는 것, 그래서 개발된 그들이 가진 능력을 동문회를 이끌어 가는 데 활용할 수 있게 만드는 것, 바로 그것이 그녀가 꿈꾸는 동문회의 모습이다.


“젊음이 재산이다.”

그녀가 후배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다. 그 귀중한 재산인 젊음을 끝까지 포기하지 말란 말도, 무슨 일에든지 열정을 가지고 도전하라는 말도, 그러나 절대 혼자는 금물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어디라도 소속돼 자신과 비슷한 관심을 가진 사람들과 서로의 장점과 경험을 나누는 것이 무엇보다 큰 도움이 된다는 그녀의 삶의 경험에서부터 나온 진심어린 조언이었다.

또한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나를 통해 상대방을 변화시키려면 먼저 내가 변화돼야 한다.’는 기본적인 가르침. 설사 상대방이 99%의 잘못을 저질렀고, 내게 1%만의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내가 저지른 1%의 잘못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 내 강점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고, 또 그 사람의 강점을 나에게 나눈다면 서로가 큰 성장을 해나갈 수 있을 거라는 것. 어느 누구에게나 모두 배울 점은 있다는 것. 이 조언을 품고 살아간다면 좋은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지 않을까.


“호기심과 열정은 나이와 상관없이 계속 돼야 할 것들”이며, “열정과 성실, 창의성 이 세 가지로 무장하고 나아간다면 어떤 분야에서든지 뛰어난 성과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그녀. 앞으로 그녀가 이끄는 여성동문회의 장미빛 미래를 감히 상상해본다.

찾아왔던 먼 길을 다시 되돌아가야 하는 기자에게 그녀는 이런 말을 남겼다. “힘든 일이 있으면 그 힘듦을 친구삼고 가라. 그러면 어느새 쉬워질 것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힘든 일이 얼마나 많은가. 그럴 때마다 그녀의 말대로 힘듦에게 말을 걸어보자. “안녕, 너가 힘듦이니? 오늘 하루도 함께 가보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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