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키르기스스탄에서 본교로 입학한 형제 △방대한(형, 왼쪽) △방민국(동생, 오른쪽)

 ‘키르기스스탄’은 중앙아시아에 속해 있지만, 우리에게 생소한 나라다. 이 생소한 나라에서 본교에 12학번으로 입학한 형제가  있다. 형의 이름은 탈란츠 울르 막사트(ТалантуулуМаксат,정치외교학과·1)이며, 동생은 탈란트 울르카나트(Талантуулу Канат, 경영학과·1)다. 그들은 한국인으로 귀화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으며, 방대한과 방민국이라는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다. 형 대한 군을 만나 이야기를 나눠봤다.

 

대한 군이 자란 곳은 어디인가요?
 키르기스스탄 수도인 비슈케크(Бишкек)에서 태어났어요. 대도시인 비슈케크의 아파트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았죠. 그러다가 승용차로는 5시간, 작은 버스로는 7시간 거리인 탈라스(Талас)라는 지역으로 이사를 갔어요. 탈라스안의 우즈구루쉬(Узгуруш)라는 마을에서 친할아버지·친할머니·작은아버지·작은어머니와 함께 살았어요. 왜냐하면 아버지는 사업을 하시고, 어머니는 키르기스어와 러시아어를 가르치는 교사이다 보니 많이 바빠서 저희를 돌볼 여력이 없었거든요.
 제가 살던 우즈구루쉬 마을 가까이에 ‘탈라스강’이 있었어요. 키르기스스탄에는 강이 2개밖에 없는데, 그중 하나가 저희 집과 가까웠죠. 집을 나오면 강과 많은 나무들, 다시 떠올려 봐도 공기가 참 맑은 곳이에요.

한국에는 어떻게 오게 됐나요?
 지난 2008년, 저희 어머니께서 한국의 호텔 식당에서 서빙하는 일을 하셨어요. 그리고 2009년도에 한국인 아버지를 만나서 재혼하셨어요. 이후 어머니께서는 저희가 한국에 오기를 바라셔서, 지난 2009년 4월에 한국에 오게 됐어요.
 어머니와 아버지의 결혼스토리는 달달해요. 아버지께서 근무를 마치시고 어머니가 일하시는 식당으로 저녁을 드시러 오셨대요. 그때 아버지께서 어머니를 보고 한눈에 반하시고 넘어가셨다고 해요(웃음). 처음에는 어머니께서 거절하셨다고 하는데, 아버지께서 3개월 동안 거의 매일 선물을 들고 식당으로 찾아오셨다고 해요. 결과는 아버지의 승이죠(웃음).

타국에 가면 먹는 것이 중요한데, 한국과 음식 문화가 어떻게 달랐나요?
 한국인들은 매일 밥을 먹듯이, 키르기스스탄인들은 아침·점심·저녁 모두 빵을 주식으로 먹어요. 밥은 1년에 4번정도는 먹었던 것같아요. 그래서 한국에 와서 처음 5개월 정도는 밥을 먹어도 뭔가 부족한 것처럼 느껴졌어요. 그래서 한동안 파리바게트에 가서 빵을 많이 사 먹었는데, 너무 달고 부드럽더라고요. 저희 주식인 빵은 팔레스타인 혹은 이스라엘 빵이랑 비슷해요. 딱딱하지는 않지만 달콤하지도 않은 빵이에요. 버터를 발라서 녹차와 함께 자주 먹었죠.
 키르기스스탄의 밥 중에 고기와 양파와 당근을 잘게 썰어 밥과 함께 볶은 ‘블로브’라는 음식이 있어요. 그런데 이 음식이 한국에서 먹어 본 볶음밥과 똑같은 맛이어서 신기했어요.(웃음)

주식이 다른 것 외에도, 키르기스스탄과 한국 간에 다른 점은 없었나요?
 처음에 한국에서 부모님과 자식이 같이 술을 마시는 것이 이해가 안됐어요. 아버지가 자식에게 술을 가르치려고 소주를 권하는 모습에 놀랐죠. 키르기스스탄은 이슬람교라서 부모님이 자기 자식이 술을 마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집을 나가라.”고 해요. 참고로 저희 아버지는 술을 전혀 드시지 않아요. 그리고 저도 기독교인이어서 세례 받을 때 포도주를 마셔 봤던 것 빼고는 술을 마셔 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아버지께서 저에게 술을 권할 일은 없지요(웃음).
 또 키르기스스탄과 한국의 결혼식은 비슷한데, 장례 문화가 달라요. 한국에서는 사람이 사망하면 화장을 주로 하잖아요. 근데 이슬람교는 화장은 절대 할 수 없고, 무조건 사람을 땅에 묻어야 돼요. 한국에 와서 아버지의 친아버지인, 그러니까 저의 친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장례식에 가 봤는데, 화장을 하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한국에 왔을 때 직접 일을 해보신 적은 없나요?
 처음 한국에 온 2009년에는 생활이 어려웠어요. 그래서 롯데리아에서 한달 정도 주로 햄버거를 만들고, 감자 튀기는 일을 했어요. 계산하는 일도 해봤지만, 제가 외국인이다 보니 언어적으로 서툴잖아요. 그래서 저한테 계산하는 일은 잘 맡기지 않더라고요. 그 외에도 일주일 정도 식당에서 서빙을 해봤어요.
 지금은 러시아에서 사업을 하는 한국인에게 러시아어 과외를 하고 있어요. 일주일에 2번 정도씩 하는데, 5개월 정도 됐어요. 기존에 통역사를 통해 사업을 했는데, 문제가 생겨 직접 러시아어를 제대로 배워서 사업을 운영한다고 하시더라고요. 제 주변 친구들도 러시아어를 잘 하지만, 한국어로 전달하는 것이 서툴러서 과외를 못하고 있죠. 그런데 사장님께 서는 제가 마음에 드셨는지 단번에 과외를 할 수 있게 됐어요(웃음).

세계에 많은 나라 중에서 한국, 그리고 한국에 많은 대학 중에서도 우리 학교에 입학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저희가 한국에 와서 다닌 교회가 영락교회에요. 영락교회의 원로 목사 님이 숭실대학교와 인연이 깊은 한경직 목사님이잖아요. 영락교회에 다녔던 러시아 친구와 우즈베키스탄 친구들이 “숭실대에 다녀서 좋았다.”고 많이 말해주더라고요. 그리고 권사님들도 숭실대학교를 추천해 주셨고요. 그래서 오로지 숭실대학교만 바라보고 지원했어요.

학교에서 생활하는 데 어려운 점은 없었나요?
 친구들도 많이 사귀고, 학교생활이 재미있어요. 주위에 몽골 친구들이 저에게 한국 학생들과 어울리기 어렵다고 고민을 얘기했어요. 그런데 저는 학과 친구들이 잘해줘서, 불편한 점 없이 지내고 있어요.
 그런데 키르기스스탄인들은 어렸을 때부터 영어 대신에 러시아어를 배웠기 때문에, 영어가 어려워요. 정치외교학과 전공 중에‘정치와 역사’ 라는 과목을 영어로 들어야 해서 가장 두려워요(웃음). 그래서 대림역에 있는 영어학원을 다니면서 회화를 첫걸음부터 배우고 있어요. 나머지 한국어 수업은 괜찮아요. 다는 아니지만 90% 정도는 알아듣고, 만약에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적어 두었다가 집에서 사전으로 찾아보죠.

현재 학교는 어디에서 다니고 있나요?
 일단 동생과 원룸에서 거주하면서 학교에 다니고 있어요. 아무래도 교회에서 하는 찬양 연습을 해야 하다 보니 원룸을 구했어요. 기숙사에서 연습을 하면 다른 학생들에게 피해를 주잖아요.

영어 수업은 어려워도 러시아어와 관련한 수업은 편하게 들었을 것 같아요.
 지난 1학기 때 ‘기초 러시아어’라는 교양과목을 들어봤어요. 점수는 당연히 A+(웃음). 교수님께서 제가 교수님보다 더 잘 안다고 깜짝 놀라셨어요. 키르기스스탄에서 초등학교 정도 수준인 것 같아요. 저희 동생은 지금 듣고 있는데, 역시 너무 쉽다고 하죠(웃음). 왜냐하면 키르기스스탄에 살 때 키르기스어와 러시아어를 둘 다 사용했거든요. 키르기스스탄인 95% 정도는 러시아어를 알아요. 키르기스어를 주로 쓰지만, 키르기스스탄에는 러시아인도 많고, 뉴스를 보면 두 개 언어가 모두 나오기 때문에 러시아어에 익숙하죠.

러시아어만큼이나 한국어도 무척 잘하시는데, 어떻게 배우셨나요?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지금 부모님이 살고 계신 경기도 이천에서 사회 동화프로그램을 통해 한국어를 배웠어요. 1단계에서 5단계까지 있는데, 5단계가 끝나면 한국 국적을 취득할 수 있어요. 저희는 공부를 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기 때문에, 현재는 이천이 아닌 이화여자대학교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있어요. 한국어 수업은 일주일에 화·수·목 6시부터 9시까지 저녁반을 다니고 있고요. 현재 저는 4단계를 준비하고 있고, 동생은 3단계를 준비하고 있어요. 5단계가 끝나면 국적을 취득하지만, 한국의 역사와 정책 그리고 문화에 대해 배워서 6단계까지도 이수할 거예요.

한국에 와서 학업도 열심히 하고 친구들도 많이 사귀었다고 했는데, 혹시 한국인과 연애를 해본 적이 있나요?
 키르기스스탄에서도, 한국에서도 한 번도 연애를 못해봤어요. 기독교인들은 한 명만 끝까지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친구들은 저에게 “결혼하기 전에, 여자친구 만나서 연애 한번 해 봐야지.”라고 하는데, 저는 이해하지 못해요. 짧게 연애하고, 그 사람을 보낸 후 어떻게 다른 사람과 만날 수 있는건지…. 저는 한 명만 만나서 끝까지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보통 키르기스스탄에서는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해요. 제가 키르기스스탄에 있을 때, 친척들이 결혼을 하라고 권유를 했죠. 현재 키르기스스탄 친구들 대부분은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고 있어요. 고등학교 시절, 주변 친구들도 3명 정도가 결혼을 했어요. 그런데 한국에 와 보니,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해서 20대 후반 정도 돼야 결혼을 하더라고요. 저도 이러한 한국 문화처럼, 취업 후에 결혼을 할 생각이에요.

앞으로의 꿈은 무엇인가요?
 “남자는 70개 전공이 있어도 모자라다.”라는 키르기스스탄의 속담이 있어요. 저는 이 말에 동의해요. 욕심이 많아서인지 하나만 하려면 모자를 것 같아요.
 원래는 3개의 꿈을 가지고 있었어요. 목사, 외교관 그리고 조종사. 현재 저는 정치외교학을 전공하고 있지만, 3학년 때에는 기독교학과를 복수전공 할 계획이에요. 제 목표는 40살이 될 때까지 조종사를 하고, 45살 정도에 키르기스스탄과 한국, 혹은 러시아와 한국 간의 외교관이 되고 싶어요. 외교관이 된 후, 돈을 많이 벌어서 목사로서 아프리카의 어려운 어린이들을 위한 교회를 세워 설교도 하고 봉사도 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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