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실역사학’의 아버지 김양선이 말한 일제 식민 통치시대 ‘삼대박해’ 가운데 마지막 박해가 신사참배 거부운동 때다. 바로 이 신사참배 거부로 숭실이 문을 닫게 된다. 1897년 문을 연 숭실이 41세가 되는 해였다.

  신사참배란 일본민족의 신이요 일본천황의 조상이라는 아마테라스 오미가미와 여러 일본 신들을 신봉하는일본의 국가종교인 신도의 신사에 참배하는 것이다. 1889년 제국헌법 1조에“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의 천황이 통치한다.”고 했고, 3조에는“천황은 신성해 침범할 수가 없다.”고했다. 제정일치를 분명히 보여주는 일본의 ‘고쿠타이’에 터한 신도국가주의의 본질인 것이다. 쉽게 말하면, 신도의 우두머리 신인 아마테라스오미가미가 일본을 세웠고, 천황은 사람의 몸을 입은 그의 후예로서 일본을 통치한다. 그러니 일본사람들은 신사를참배하는 것이다.

  1937년 중국과 전쟁하면서 일본식민통치세력은 일본인과 조선인의 조상은 같다고 외치기 시작했다. 우리 겨레를 군대와 군수공장, 그리고 정신대에 동원하기 위한 획책이었다. 더 나가 일제는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했다. 아마테라스오미가미를 모신 신사를 그들과‘한 뿌리’인 조선사람들도 마땅히 참배해야 한다는 것 이다. 내키지 않았겠지만 조선 사람들이 줄지어 참배하고, 전국의 모든학교는 교장과 선생들이 앞서고 학생들이 뒤에 줄지어 신사에 참배하였다. 기독교인들에게 신사참배 문제는 종교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으나, 많은 기독교인들과 선교사들이 세운 적지 않은 기독교 학교들이 일제의 강요에 굴복하고 신사에 참배했다.

  그러나 숭실은 신사참배 강요에 두 무릎을 꿇을 수 가 없었다. 민족정기와 신앙지조를 버릴 수가 없었다. 다른 학교는 오늘의 이해와 내일의 이득을 살피며 굴종의‘넓은 길’을 선택하였지만, 숭실은 민족정기와 신앙지조를 버릴 수가 없었다.‘ 좁은길’, 폐교의 길을 택하였다. 죽어서 부활한 그리스도의 그 부활을 굳게 믿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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