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단 김승준(생활체육·1) 선수

  지난 6월 그는 견디기 힘든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2013 FIFA U-20 남자 월드컵 쿠바와의 첫 경기가 있기 사흘 전이었다. 배가 아파왔다. 진단 결과 맹장염이었다. 선수단에서 하차해야만 했다. 3년간의 준비가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억울하고 분했다. 그래서 더욱 열심히 훈련에 임했다. 결국 그는 7월 22일(월) 개최된 제44회 전국추계대학축구연맹전에서 빛을 발했다. 그의 맹활약과 축구단의 피나는 노력으로 본교는 끝내 우승을 차지했다. 각종 언론은 그를 해결사라고 치켜세우며 호평을 쏟아냈다. 한국 축구계의 유망주로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는 그는 숭실대 축구단 소속의 김승준(생활체육·1) 선수다.

전국추계대학축구연맹전에서의 우승
  지난달 6일(화) 강원도 태백종합운동장에서 열린 전국추계대학축구연맹전 결승에서 본교는 단국대를 2대 0으로 꺾고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여러 대회에서 우승도 해보고 상도 타봤지만 이렇게 기쁜 적은 없었어요. 뭔가 가슴 속의 응어리를 푼 것 같아 후련했죠.” 김승준 선수의 지난 대회 우승소감은 남달랐다. 대회 우승 전에 그는 일생일대의 기회를 놓치는 아픔을 겪어야 했기 때문이다. 부상으로 인해 U-20 남자 월드컵 출전이 불가능해진 것이었다.

  “각오가 남달랐어요. U-20 대표팀 최종 엔트리에는 제 이름이 있었어요. 하지만 갑작스런 맹장염 때문에 올해 U-20 남자 월드컵에서 한 경기도 뛰어보지도 못하고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죠.” 그는 그 뒤로 많이 울기도 하고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다고 했다. 그의 한숨과 떨리는 목소리에서 그 당시의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수술 후 병원에서는 한 달 정도 쉬라고 했지만 한 달 내내 병원에 누워 있을 수 없었어요. 결국 2주 반 동안만 쉬고 7월 5일에 숭실대 축구단으로 복귀했어요. 이미 지나간 것은 어쩔 수 없으니 앞으로 잘하는 것만이 한을 풀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어요.”

결승골의 주인공, 팀을 구하다
  그는 한마디로 해결사 그 자체였다. 2무의 성적을 내고 있던 숭실대 축구단은 조별리그 3차전에서 경희대와 맞닥뜨렸다. 무승부만 돼도 본선 진출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전반에 경희대에게 한 골을 내주었다. 그러나 곧 후반에 투입된 김승준 선수는 후반 16분, 44분에 각각 동점골과 역전골을 터뜨리며 팀을 위기에서 구했다. “경희대와의 경기가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 같아요. 승리가 절실했던 우리 팀에게 도움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았어요. 무엇보다도 팀이 본선에 진출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했죠. 팀이 이겨야 저도 경기를 할 수 있으니까요.” 그는 그 후 우석대, 선문대, 홍익대와의 본선경기에서도 결승골을 만들어내며 골잡이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하지만 정작 결승에서는 무득점이었다.

  “홍익대와의 4강전에서 골에 대한 부담감이 있었어요. 골 욕심을 가지고 경기에 임하다보니 팀에 도움이 안 되는 것을 느꼈어요. 제가 슈팅하지 않고 동료에게 패스로 연결했으면 충분히 골로 연결될 수 있었던 몇몇 찬스를 제 골 욕심 때문에 날린 것 같았어요.” 그는 경기 후 주변인들로부터 “골에 너무 집착한 것 아니냐”는 충고도 들었다고 한다. “결승에서는 골보다는 팀을 살리는 플레이를 했어요. 확실히 확신이 서지 않는 찬스에서는 과감하게 동료에게 공을 넘겼죠. 그러니까 오히려 경기가 풀리더군요.”

  그는 수술 후 경기라 몸 상태가 최상이 아니어서 육체적으로 힘들었다고 토로했다. “안 힘들었다면 거짓말이죠. 제가 태어나서 뼈가 부러지거나 크게 아파서 수술을 해본 적이 없었거든요. 처음 겪는 일이라 더 힘들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렇게까지 활약할 수 있었던 데는 수많은 주변인들의 위로와 격려가 있었다.

“주변의 위로, 회복에 큰 힘이 됐다”
  그는 무엇보다 부모님의 위로와 주변인들의 응원 메시지가 부상으로부터 회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부모님은 제가 U-20 월드컵 경기에 출전하지 못한 데 대해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어요. 분명히 부모님께서도 아쉬운 마음이 있었을 텐데 그런 내색조차 한 번 하지 않으셨죠. 오로지 제 몸에 대해서만 걱정해 주셨어요. 대표팀과 학교 축구단 동료로부터 위로와 격려의 문자를 받을 때마다 마음이 따뜻해졌어요.” 특히 중앙대 소속의 류승우 선수는U-20 월드컵 쿠바와의 경기 당시 역전골을 만들어 낸 뒤 김승준 선수의 하트 세리머니를 펼쳤다. 부상으로 대표팀에서 하차하게 된 김승준 선수를 향한 위로의 세리머니였다. “솔직히 말하면 처음에는 저의 공백을 지웠다는 기사를 볼 때마다 배가 아프고, 어떤 순간에는 팀이 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어요. 하지만 류승우 선수의 세리머니를 보고 정신을 차렸죠. 저 대신
발탁된 나성수(요코하마 FC·21) 선수도 평소에 잘 알고 지내던 친한 형이었는데 저를 계속 위로해 줬어요. 저도 대신 제 몫까지 열심히 해달라고 형을 응원했어요.”

땅은 비온 뒤 굳어지는 법
  “항상 잘 될 수만은 없죠. 한 번 쉬어가는 시간이라고 생각했어요.” 6월에 있었던 부상의 비운에 대한 그의 정리는 이러했다. “안 다쳤으면 더 좋았겠지만 좀 더 성숙해지는 계기가 된 것 같아요. 인생은 길고, 아직 저에게는 선수로서 활동할 날이 많이 남았으니까 너무 이 일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앞으로 선수생활 하면서 이번처럼 큰 대회 앞두고 부상당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잖아요. 이제 이런 상황을 어떻게 이겨내야 할지 조금이나마 알게 된 것 같네요.” 그는 이번 부상으로 인해 얻은 것은 많지만 잃은 것은 U-20 남자 월드컵 뿐이라고 고백했다.

초등학생 때부터 꿈은 오로지 축구선수
  “축구선수요.” 어릴 때 꿈이 뭐였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확고했다. 축구선수. 다른 꿈은 가져본 적조차 없단다. 축구선수는 수많은 남자 초등학생들의 꿈이다. 그 역시도 한때는 그 수많은 남자 초등학생들 중 한 명이었다. “초등학교 때도 중학교 때도 고등학교 때도 제 꿈은 항상 축구선수였어요. 축구를 좋아했고, 잘하기도 했어요. 축구 말고는 딱히 좋아하는 운동도 없었죠. 지금까지도 축구 말고 다른 운동은 잘 못해요.”

  축구에 완전히 빠져 항상 운동장을 뛰어다니던 그가 본격적으로 축구팀에서 활동하게 된 것은 4학년 때부터였다. “제가 초등학교 3학년일 때였어요. 그 때 제가 반장이어서 방과후에 반에서 친구들에게 청소를 시키고 있었죠. 그런데 한 친구가 청소는 안 하고 갑자기 절 가리키면서 어떤 아저씨와 얘기를 나누고 있는 거예요. 그 아저씨가 절 부른다고 해서 찾아가 봤더니 초등학교 축구팀 감독님이셨어요. 알고 보니 감독님이 새로 영입할 학생을 찾기 위해 저희 교실을 지나가던 중에 그 친구에게 물었던 거죠. 여기서 누가 축구를 제일 잘하냐고. 그래서 그 친구가 절 가리킨 거였죠.” 그 후 그는 입단 테스트를 받고 4학년 때부터 이리동초등학교 축구팀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김계중 감독님이었는데 아직도 고향에 가면 가끔씩 그 분을 찾아뵙곤 해요. 감독님이 제가 축구선수의 꿈을 이룰 수 있는 첫 발판을 마련해 주신 셈이죠.”

한국 축구계의 떠오르는, 떠오를 샛별
  그가 국내 축구계의 유망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3학년 때부터였다. “왕중왕전 중등부에서 우승을 하고 ‘올해의 선수상’을 받으면서 저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부쩍 는 것 같아요.” 그 후로 그는 지난해 2012 AFC U-19 챔피언십 국가대표로 발탁되어 아랍에미리트 경기장을 누볐다. 한편 언론의 뜨거운 관심이 한 때는 그에게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제가 말을 그렇게 잘하는 편이 아니다 보니 인터뷰를 잘 못해요. 매번 경기 후에 스포츠 기자들이 질문을 쏟아내는 게 부담스러웠죠. 어떤 말을 해야 하나? 실수는 하지 않을까? 그런데 기자 분들이 다행히 기사를 잘 써주셔서 지금은 좀 적응했어요.”

  U-19 챔피언십, U-20 남자 월드컵 국가대표였던 그는 월드컵에서 3골을 넣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축구선수라면 누구나 월드컵 무대에서 뛰는 게 꿈이지 않을까요? 아직 어리기 때문에 내년에는 못 나갈 것 같고 만약 출전할 수 있다면 2018년 러시아 월드컵에서 뛰게 될 것 같아요. 그 전에 올림픽에도 출전해서 좀 더 크고 많은 국제무대를 경험하고 싶어요.”

한국 축구계의 떠오르는, 떠오를 샛별
  그가 국내 축구계의 유망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3학년 때부터였다. “왕중왕전 중등부에서 우승을 하고 ‘올해의 선수상’을 받으면서 저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부쩍 는 것 같아요.” 그 후로 그는 지난해 2012 AFC U-19 챔피언십 국가대표로 발탁되어 아랍에미리트 경기장을 누볐다. 한편 언론의 뜨거운 관심이 한 때는 그에게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제가 말을 그렇게 잘하는 편이 아니다 보니 인터뷰를 잘 못해요. 매번 경기 후에 스포츠 기자들이 질문을 쏟아내는 게 부담스러웠죠. 어떤 말을 해야 하나? 실수는 하지 않을까? 그런데 기자 분들이 다행히 기사를 잘 써주셔서 지금은 좀 적응했어요.” U-19 챔피언십, U-20 남자 월드컵 국가대표였던 그는 월드컵에서 3골을 넣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축구선수라면 누구나 월드컵 무대에서 뛰는 게 꿈이지 않을까요? 아직 어리기 때문에 내년에는 못 나갈 것 같고 만약 출전할 수 있다면 2018년 러시아 월드컵에서 뛰게 될 것 같아요. 그 전에 올림픽에도 출전해서 좀 더 크고 많은 국제무대를 경험하고 싶어요.”

그에게 대학이란
  “프로세계 이전에 대학을 경험해 보고 싶었어요.”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프로구단에 입단할 수 있는 충분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대학진학의 길을 선택했다. “프로세계에 바로 뛰어드는 것보다는 대학에서 먼저 경험을 쌓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요. 사실 대학도 거의 프로세계와 비슷하지만 그래도 덜 험하잖아요. 바로 성인무대로 가면 적응하기가 힘들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는 준비가 되면 프로로 입단하는 것도 하나의 길로 생각하고 있었다. 대학생활은 그의 로망이었다. “적어도 인생에서 대학생활 한 번쯤은 해 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정작 지난 번 엠티는 못 갔어요. 스케줄 때문에 학과생활 참여하기가 너무 힘들더라고요. 아직도 엠티를 가는 게 소원이에요. 또 축구단 선수들은 생활체육학과 소속이긴 하지만 학과생활을 못하니 과 친구들이 많지가 않아요.” 생각보다 그가 대학생활에서 해 보고 싶은 것은 소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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