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현역’ 이라 불리는 방지일 목사(평양숭실 24회 입학)가 지난 달 10일(금) 하늘의 품으로 돌아갔다.
  방 목사는 21년간 중국 공산당 치하에서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했으며 한국교회의 변화를 위해 헌신했던 큰 어른이었다. 방 목사는 100권이 넘는 책을 펴내기도 했으며 그의 저서 『피의 복음』은 중국어로 번역돼 중국 가정교회의 교재로도 사용되고 있다. 방 목사는 치우치지 않은 신앙으로 말씀과 은혜를 전했다. 최근까지도 북한 선교에 힘쓰며 활발하게 활동했던 방 목사가 전하는 마지막 이야기를 담았다. (이 지면은 지난 봄 씨즌넷과의 인터뷰를 재구성한 것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중국에 선교사로 가 계시고, 어머니는 안 계셨어요. 어머니는 절 낳고 얼마 안 돼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할아버지, 할머니 밑에서 자랐죠. 할아버지는 아브라함의 꽃과 같은 분이셨어요. 별로 배운 건 없으셨지만, 믿음이 깊으셨어요. 할아버지의 역사를 써보고 싶은 소망이 있어요.

 


예수를 믿기 시작한 할아버지


  언양 방씨가 한 동네에 모여 살았어요. 117년 전이에요. 그때 할아버지가 예수를 믿기 시작하셨어요. 마을 사람들은 제사를 지내지 않으려 한다고 할아버지를 핍박했죠. 증조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셨을 때, 교회 식대로 장례를 치렀죠.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할아버지를 내쫓았어요. 제사를 지내지 않으려고 예수를 믿는다는 거였죠. 할아버지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고 멀리 쫓겨나셨어요. 지낼 집이 없어서 땅에 구멍을 파고 사셨어요. 농사를 지으려 해도 농토가 있어야 하잖아요. 그래서 여러 사람들에게 농토를 달라고 부탁하셨어요. 하지만 사람들은 ‘주일에 일 안하고 교회나 가는 예수쟁이’를 못 믿겠다며 농토를
주지 않았죠. 그러다 어느 사람이 땅을 줬어요. 돌만 잔뜩 튀어나와서 도저히 밭이라곤 할 수 없는 땅이었죠. “할 테면 해보라.”고 비웃었던 거예요. 하지만 할아버지는 밤낮으로 그 땅을 일구셨어요. 돌도 빼고, 잡초도 뽑고요. 마침내 그 메마른 땅에서 뭔가 나는 거예요. 사람들은 “예수가 복을 주는구나.”하고 감탄했어요. 할아버지는 비로소 땅을 받으실 수 있었죠. 할아버지는 평생을 소작농으로 사셨지만, 그렇게 육남매를 모두 먹여 살리셨어요.

 


할아버지와 하늘


  출애굽기 제2장 12절에 보면 “모세가 좌우를 살펴보니 아무도 없었더라.”라는 구절이 있어요. 하늘을 쳐다보면 하나님이 계신 걸 모르고, 계속 좌우만 쳐다본 거죠. 좌우만 쳐다보니 아무도 안 보이는 게 당연해요. 하지만 농사를 짓고 사는 동양 사람들은, 항상 하늘을 봤죠.

  할아버지도 항상 하늘을 보셨어요. “하늘이 높구나, 비가 많이 오겠는데.”, “가물겠는데.” 하셨어요. 그렇게 농경민족은 항상 별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살았어요. 하나님을 영접하면서 말이에요. 그래서 서방 박사가 아니라 동방 박사가 예수님을 찾아온 거겠죠. 어쩌면 동방 박사 중에 한국 사람의 친척이 있는지도 몰라요.


  하지만 유목 민족은 사방을 봤죠. 어떤 사나운 짐승이 와서 양을 잡아갈까, 두려움에 떨면서요.
몽둥이를 들고 늘 경계를 했어요. 서양 문화가 도리도리 좌우를 살피는 것이라면 동양 문화는 끄덕끄덕 하늘을 보는 것이에요. 그래서 난 우리 할아버지가 정말 훌륭하다고 생각해요. 항상 하늘만 쳐다보시고 사셨으니까요.


하나님의 은혜


  어머니가 저를 낳고 얼마 안 있어 돌아가셔서, 전 모유를 못 먹고 자랐어요. 대신 할머니가 밤을 주셨죠. 물에 밤을 갈아 넣으면 까맣게 돼요. 그렇게도 먹고, 삶아도 먹으면서 몇 년 동안 많은 밤을 먹었어요. 그러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봄 소풍을 가게 됐어요. 가까운 곳에 있는 폭포로요. 기쁜 마음에 아침도 제대로 먹지 않고 집을 나섰죠. 그때도 할머니는 밤을 싸주셨어요. 그런데 제가 먹자마자 다 토해버렸어요. 결국 소풍은 못 가고 집으로 돌아왔고, 병원에서 치료를 많이 받았지만 이때부터 조금만 먹어도 체하게 됐어요. 할머니가 고생을 많이 하셨죠. 안 해본 게 없어요. 하지만 양약을 먹고, 민간요법을 해봐도 호전되지 않았어요. 때문에 몇 해 동안 정말 힘들었어요.

  결국 기도를 하기 시작했어요. 새벽에 동네 산으로 올라가서 나무 밑에 앉아 기도를 하다가 날이 밝으면 성경책을 읽었죠. 결국은 나았는데, 하나님이 은혜로써 병을 고쳐주신 거라고 생각해요.

 


일제 치하에서의 전도


  강사들이 주일학교를 열었어요. 밤에는 부흥회도 했구요. 송영길이 설교를 하고, 제가 집회를 했죠.
  그런데 무장한 일본 경찰이 와 있는 거예요. 당장 그만두라고 하더군요. 송영길이 “우리는 갈 곳이 없다! 만주에 가면 중국 사람에게 배척받고, 일본에서는 일본 사람들에게 치이지 않느냐!”했죠. 그러자 일본 경찰이 예배를 중단시키더라구요.

  하지만 저는 그만 두지 않았어요. 예수를 가까이 하자는 찬송을 얼마나 많이 불렀는지 몰라요. 일본 경찰에게 따졌죠. 왜 중단을 시켰느냐고, 만주에 가서도 못 살고 일본에 가서도 못 산다고, 우리는 아무데서도 못 사는데 왜 예배도 못 하게 하느냐고,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소리쳤어요. 이렇게 예배를 중지당한 것 말고도 일이 많았어요. 일본 경찰들이 무섭잖아요. 얼마나 괴롭힘을 많이 받았는지 몰라요. 하지만 사람들이 열정적으로 호응을 해주니, 내가 뭐 못할 게 있겠어요. 경찰도 꼼짝 못했죠. 어려운 때였지만 견딜
수 있었어요. 그 때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제가 이런 말해도 실감을 못할 거예요.

 


세브란스 의전과 평양 숭실의 사이에서


  저는 수학을 잘했어요. 항상 만점을 받았고, 선생님도 칭찬하셨죠. 그걸 숙부들이 아시고, 세브란스 의전에 입학하라고 하셨어요. 하지만 할아버지는 아무 말씀을 안 하셨어요. 그냥 같이 새벽기도를 가고, 품에서 같이 자는 게 전부였죠. 전 할아버지의 신앙을 몸에 받았어요. 그래서 평양 숭실에 가기로 마음먹었죠. 세브란스 입학 준비를 다 해놨는데, 숙부들의 반대가 컸어요. 하지만 저는 평양 숭실에 가서 신학을 하고 싶었어요. 아버지가 목사셨으니 숙부님들도 더 이상 반대할 수 없었어요.

 


평양 숭실에서의 4년


  평양 숭실에는 신학을 하러 갔죠. 지금 젊은이들이야 암만 설명해도 모를 거예요. 항상 하늘만 쳐다보시고 사셨으니까요. 신앙적으로도 그렇고, 축구도 잘했죠. 숭실 대학 축구가 전국 1등이었어요. 우리 군악대가 평양성을 싹 돌고, 밤새 교가를 부르며 캠프파이어를 하기도 했어요. 여름에 여러 봉사를 하러 다니기도 했죠. 브나로드 운동, 한글 보급 운동 같은 것들요. 크게 기억에 남아요.

 

 

"숭실의 강제 폐교는 자연과 하나님이 주신 시련 가운데 큰 시련이죠."

 


서울 숭실 재건


  큰 자랑이죠. 교회들도 그 다음부터 회개를 했고요. 죽었다 살아난 학교 아니겠어요. 소식을 듣고 1957년에 중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왔어요. 신입생이 얼마나 되느냐, 대전대하고 합치느냐 하는 여러 가지 질문도 했어요. 숭실에 대한 애착이야 말할 게 없죠.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그런데 학생들이 많이 입학하지 않으니 속상한 마음이 들었죠. 그런데 이제는 많은 학생들이 입학해 만 오천 명 가까이 되는 학생들이 숭실을 다닌다고 들었어요. 숭실은 이제 살았어요. 살아났어요. 진리를 그대로, 학교의 이념을 가지고 살아
났죠. 정말 고마워요.

 


숭실에 바라는 점 


  세속의 학교보다는 우리 숭실 대학에 선교사가 많았어요. 또 누군가 그 다음 자리에 오르길 바라요. 어느 이사가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방 목사님, 숭실이 너무 크게 되는 걸 바라지 마세요. 자신의 신앙이 더 커야 합니다.” 수많은 일류 대학이 처음에는 기독교 정신으로 세워졌지만, 점차 학교가 커가며 신앙이 사라졌다는 것이죠. 숭실은 초기에 여러 문제가 많았어요.

  그러나 이제는 활기차 보여요. 경영진도 알찬 이들이 나오는 것 같구요. 예전에 숭실과 다른 대학들이 합쳐질 뻔한 적이 있어요. 하지만 신앙의 이유로 반대하는 사람이 있어 무산됐죠. 참 분한 일이에요. 하지만 이제는 숭실이 잘 되고 있으니 마음이 놓여요. 숭실은 죽었다 살아난 학교예요. 하나님이 숭실을 안 지켜주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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