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적 인간은 왜 비도덕적 사회를 만들까. 개신교 신학자인 라인홀드 니버가 저서『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를 통해 던지는 질문이다. 책을 읽으며 이 질문이 떠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인간 사회에는 윤리 ‘교육’이 존재한다. 동시에 윤리는 ‘문화’로 존재한다. 이는 인간이 얼마나 이타성을 갈망하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윤리가 교육과 문화로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니버의 질문이 암시하듯, 우리 인간 사회는 퍽 이기적이다. 바로 이 부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공하는 게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이다. 그는 인간이 이기적 속성을 갖는 유전자로 구성되어 있기에, ‘선한 인간’이란 근본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때문에 니버가 제시한 ‘도덕적 인간’이라는 전제는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반론을 예상해볼 수 있다.

  인간을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통찰하는 것은 의미있는 접근이다. 또, 이 관점에서 ‘이타성 교육’을 언급하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유전자의 이기적 속성을 뛰어넘을 방도이기 때문이다. 도킨스는 협력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온갖 경쟁이 조장된 이 시대에 협력은 경우에 따라서는 민감하기까지 한 영역이다. 그러나 여러 사례를 통해 도킨스는 궁극적으로 협력이 더 유리하다고 말한다. 이는 우리 인간이 분명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다.

  그러나 도킨스의 이와 같은 주장들 속에는 가장 중요한 하나가 안 보인다. 바로 생명의 의미이다. 도킨스는 이른바 DNA의 ‘설계자’는 없다고 일축한다. 또한 그러한 설계자에 대한 믿음이 허상으로 존재한다며 종교를 향한 곱지 않은 시선도 드러낸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우리 인간은 그저, ‘존재’하는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보이는” 것만으로 인간을 규정한다면야 그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도 생각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유전자는 어쩌면 한낱 껍데기에 불과한 건 아닌지. 인간의 본질과 생명의 의미는 보이는 것만으로 규정할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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