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구도시인 시애틀의 연안에 서식하는 고래들이 바다로 스며든 카페인의 영향으로 불임(不姙)이 되었다는 외신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글로벌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지적하는 이 기사의 본의(本意)보다는 고래가 커피에 취해있다는 것이 더 재미있었다. 고래가 불임이 되어 멸종의 위험에 직면하고 있다는데 왜 이 도시에 있는 스타벅스 커피 1호점만 생각나는 것인지. 지금 전 세계를 뒤덮고 있는 이 거대한 커피 회사가 시발(始發)했던 곳에서 마셨던 ‘의미 있는’ 커피의 향기가 지구에서 가장 거대한 포유류가 직면한 고통보다 더 낭만적으로 느껴져서 그런 것일까. 마이크로소프트 본사가 지척의 거리에 있고 보잉(Boeing) 또한 이 도시에 있지만, 커피 마니아 축에도 끼지 못하는 내가 다분히 관능적으로 보이는 인어 모양을 한 1호점의 옛날 로고 앞에서 열광했던 것이 사실이다. 물론 이 다국적 커피 회사가 한국에 상륙하기 훨씬 이전의 일이다.현재의 초록색 로고가 한국의 모든 거리를 ‘접수’하는 순간부터 나는 커피를 더 이상이 즐기지 않게 되었다. 낭만의 붕괴는 절연(絶緣)을 낳는다.

  시애틀은 계절의 변화가 뚜렷하고 볼 것도 많아서인지 국내외 영화의 공간적 배경으로 많이 사용되어 왔다. 한때 한국인에게 가장 호감(好感) 있는 미국 여자배우로 선정되었던 멕 라이언과 언제나 소년 같은 톰 행크스가 열연한 ‘시애틀의 잠 못 이르는 밤(Sleepless in Seattle)’, 그리고 현빈과 탕웨이 주연의 ‘만추’는 이 도시의 각기 다른 분위기를 잘 보여준 바 있다. 북서부 최고의 랜드마크 스페이스 니들(Space Needle)에서 뉴욕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으로 사랑의 하트가 끊임없이 이어질 것 같기도 하고, 이미 ‘시장 이상의 시장’이 되어 버린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Pike Place Market)의 작은 통로에서는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벌어질 것도 같다.

  시베리안 허스키(Siberian Husky)가 학교의 상징물로 유명한 워싱턴 대학교(University of Washington) 캠퍼스에서 바라다 보는 태평양 연안의 야경과 시애틀의 겨울을 규정하는 짙은 안개 속에 감춰진 ‘hilly’한 다운타운
의 모습은 아수라 백작의 양쪽 얼굴처럼 다르다. 이런 몽환적인 여러 모습에 이끌려 미국인들은 이 곳에서 살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시애틀은 미국인이 살고 싶어 하는 도시리스트의 상위권을 언제나 차지한다. 차로 세 시간이면 캐나다의 밴쿠버로 갈 수 있다는 것도 또 다른 매력이 될 수도 있겠다.

  스노퀄미(Snoqualmie)폭포의 장관, 레이니어(Rainer)산의 만년설, 한번쯤은 꼭 일해보고 싶은 글로벌 기업의 본사, 비교를 거부하는 시애틀만의 황홀한 가을비, 그리고 모든 방문객을 잠시나마 커피 제국의 메카로 인도해주는 진할 거 같지만 의외로 은은한 커피의 향을 느끼고 싶은 사람들에게 이 도시를 권한다. 미국에는 이런 도시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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