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갈림길에서 고민한다. 때로는 내가 예상하지 못한 길이 내 인생을 성공으로 이끌 수도 있다. 이번 인터뷰의 주인공인 한상돈(법학·74) 동문은 익숙한 길이 아닌 새로운 길을 택해 대만으로 유학을 갔다. 선택에 확신은 없었지만 묵묵히 앞만 보고 걸었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는 그 선택 덕분에 자신이 진정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었다. 동북아기업법률연구원을 설립하고, 현재 아주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인 법학 전문가 한상돈 동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대학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활동이 있다면 뭐가 있을까요?
  저는 학교 신문사 편집국장을 했어요. 제가 학교에 다닐 당시는 숭실대학교가 아니라 숭전대학교였는데 숭실대학교와 대전대학교가 통합됐을 때였죠. 그래서 신문 이름도 <숭전대학신문>이었고, 대전캠퍼스와 서울캠퍼스를 오가며 대전에 있는 기자들과 함께 신문을 만들었어요.

  사실 편집회의를 할 때 중요 기사를 대전과 서울 중 어느 캠퍼스의 기사로 할 것인지 싸우는 일이 많았어요. 아무래도 자기 속한 대학에 관한 기사를 1면에 싣고 싶으니까요. 결국, 한 주마다 돌아가면서 중요 기사를 싣기로 합의했어요. 대전 친구들은 착해서 저희가 우기면 양보해 주고 그랬어요. 그러면 저희도 미안해서 다음번에 양보해 주고… 이것을 반복하다 친해졌죠. 굉장히 가족 같았어요. 지금은 시대가 달라져서 옛날과는 또 다르겠지만요.

  가장 힘들었던 것은 언론 자유를 침해당할 때였어요. 저희가 북한에 대한 의식구조에 관해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어요. 당시 신문을 배부하는 과정에서 형사가 지키고 서 있다가 ‘북괴’를 ‘북한’이라고 표현했다고 배포를 금지했어요. 그 당시에는 사찰이 당연시되는 시대였기 때문에 정부에 관한 비판 기사를 쓰려면 많이 고민하며 편집회의를 해야 했죠.

  인생 선배에게 여쭙고 싶어요. 전공 공부와 기자활동이 큰 연관성을 가지나요?
  신문사 활동을 하면서 느낀 점이 있다면 현장에서 배우는 것이 많다는 것이에요. 사실관계를 판단할 때도 반드시 현장에 있어야 해요. 이건 제 인생의 신조가 됐어요. 또한, 신문사 활동을 하면서 세상을 보는 시야가 넓어졌어요. 기사도 쓰고 사건을 분석하면서 깊고 다양한 생각을 할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진로와 관련해서 특히 학보사 학생들이 고민이 많을 거예요. ‘언론사에 취직할 것도 아닌데이 일을 계속해야 할까’하는 생각도 하겠죠. 저 역시 그런 고민을 했고요. 그런데 이런 종류의고민은 대학 시절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평생 해야 하는 고민인 것 같아요. 제가 내린 답은 이것 저것 재보지 말고 어떤 상황에 놓이든 어떤 일을 하든 열심히 해보라는 것이에요. 저는 로스쿨 학생들에게 뒤돌아보지 말고 3년만 죽도록 해보라는 말을 많이 해요. 당장 진로와 관련 있는 일인지 확신이 서지 않아도 활동을 하면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이 많아요. 또한, 당장 직접적인 도움이 되지 않아도 결국 그 일을 통해 인생관을 세우고 세상사는 방법을 체득할 수 있어요. 때로는 너무 고민하지 말고 현재 해야 하는 일에 집중하는 것도 필요해요.

  숭전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우리 입학할 때는 법학과가 아니라 법경대학으로 입학했어요. △법 △무역 △경영 △경제학을 배우다가 1년 후에 자기가 원하는 전공을 선택할 수 있었죠. 저는 그중에서 법학과를 선택했어요. 법학과를 선택한 이유는 제 적성에 가장 맞는다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또 당시에는 법학과를 졸업하면 기업이나 은행 등 취업의 폭이 넓었어요.

  당시 배웠던 법학이라는 전공을 이렇게 평생에 걸쳐 활용하게 될 줄 알았나요?
  몰랐어요. 저도 진로에서 시행착오를 겪었거든요. 제약회사 법무팀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는데 1년이 채 안 돼 이건 제 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일단 너무 재미가 없었어요. 회사의 부속품처럼 일하기보다는 작더라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었어요. 또 힘든 것은 장래성이 없다는 것이었어요. 미래를 생각해 보면 아마도 10년간 준비해서 회사의 이사가 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평생을 천천히 진급하면서 살아야할 텐데 그 시간을 기다리는 게 너무 아까웠어요. 그래서 그 10년을 투자해서 다른 길을 찾아보자고 마음먹고 대만 유학을 떠나게 된 거죠. 대만에 가서도 법을 전공하고 석·박사 학위를 따게 됐죠.

  법 중에서도 어떤 분야를 전공했나요? 그 전공을 공부하게 된 이유가 뭔가요?
  전공은 중국 법제사(중국법)이에요. 중학교때 중국역사를 배우게 됐는데 너무 재미있더라고요. 그 뒤 계속해서 관심을 가지고 중국역사를 공부했어요. 대학에 들어와서는 주로 서양 법제사만 배웠지만, 중국법에 대해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그러다 대만으로 유학을 가면서 중국법을 배울 수 있게 됐죠.

  동양 국가에 있어 법의 기본은 중국법이에요. 조선시대 우리나라의 법전으로 대명률이라는명나라 법전과 경국대전이라는 우리 고유의 법전이 있었어요. 우리나라가 중국법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뜻이죠.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일본과 베트남 등 아시아지역이 전반적으로 중국법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그런데 근대화를 통해 다른 여러 서양문물과 함께 서양법이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됐어요. 일본에 의해 간접적으로 독일법을 계수(다른 법을 참고해서 우리나라 법을 만드는 과정)하다보니 동양의 의식과 생활구조에 대한 고려 없이 강제적으로 법제를 적용하게 됐고 오류도 많았어요. 사실 우리 의식은 전통법인 중국법과 동양사상에 익숙할 수밖에 없거든요. 서양의 발전된 법률 시스템도 배워야 하지만 우리 법으로 만들고 우리 체질에 맞게 재창조하는 과정에서 중국법에 대한 이해도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고 봐요.

  옛말에 가장 무서운 벌을 천벌이라고 표현했어요. 하늘에서 내려온 벌이라는 뜻이죠. 이것은 동양법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에요. 예부터 정권을 잡는 사람을 천자, 혹은 천제라고 불렀어요. 하늘의 아들인 사람에게 권위를 부여하고 그에 따라 법률시스템이 마련된 것이죠. 또한, 예로부터 우리 법률 체계 중에는 병든 아버지를 위해 아들이 대신 감옥에 갈 수 있다는 조항이 있었어요. 이처럼 우리나라 법과 동양법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사회·문화적 배경을 이해해야 해요. 자연 친화적이고 윗사람을 공경하고 약자를 돕는 동양 법사상을 익혀야 해요.


  유학생활을 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것이 무엇이었나요?

  언어가 달라서 의사소통이 힘들었어요. 당시 대학생이 경비를 덜 들이고 유학을 갈 수 있었던 곳은 독일이나 대만밖에 없었어요. 대만의 경우 국립대학에 입학하면 학비가 면제되고 장학금도 잘 나오거든요.

  당시에는 대부분 영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중국어를 배우려고 하는 사람도 없었고 중국어 학원도 없었어요. 그래서 그 당시 명동에 있던 중국 주한대사관을 방문했죠. 일주일에 한 번씩 열리는 어학코스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기초 중국어 강좌를 듣곤 했어요. 보통 다른 사람들은 일년 정도 배우고 떠나는데 저는 거의 2년을 충분히 배우면서 투자했어요. 또한, 대만에 가고 나서도 국립 사범대학에서 따로 어학코스를 밟았어요. 간절했기 때문에 그만큼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대만에 유학을 다녀온 뒤에는 무엇을 했나요?
  대만에서 석·박사를 딴 뒤에는 다시 한국에 나와서 5년간 한양대학교와 본교에서 강사생활을 했어요. 그리고 연변대학 과학기술학원에서 교수로 7년 정도를 보냈어요. 그곳에서 아주 행복했어요. 그 당시 우리나라에게는 중국이 낯설었죠. 저희는 반공교육을 받던 세대라서 그런지 한국에서는 중국을 무조건 못살고 안 좋은 나라로 저평가하는 경향이 있었어요. 그런데 직접 가서 보니까 중국은 정말 살만한 나라고 학생들도 순수하게 배움에 대한 열정을 갖고 있었어요. 그곳에서 아주 좋은 시간을 보냈고 그 경험이 현재 한중법학회에서 회장을 맡아 열심히 운영하게된 계기가 된 것 같아요.

  해온 일들을 보면 한국과 중국을 연결하는 일에 유독 관심이 많은 것 같아요.
  법학과 관련된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지만, 일반 법률전공은 그다지 저에게 잘 맞지 않았어요. 분쟁에 뛰어들고 어떤 일의 시비를 가리는 것을 잘할 자신이 없었어요. 오히려 저는 중국법의 전문가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기업들을 코치해 주는 쪽이 더 잘 맞는 것 같아요. 작년 말에 한중 FTA 체결돼서 효력이 발생하면서 앞으로 많은 중국법이 우리 사회에 필요하고 우리법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중국 변호사들이 한국에 많이 나와 있는 이유도 그것이죠. 현재 한국에 법과대학과 로스쿨 합쳐서 중국법을 전공으로 가르치는 교수가 열 명밖에 안 돼요. 앞으로 중국과의 교류가 점점 늘어나는 만큼 중국법을 전문으로 가르치는 사람들이 많이 필요할 거예요.

  동북아기업법률연구원은 어떻게 만들게 됐나요?
  연변대학 과학기술학원을 가 보니 한국 중소기업들이 중국법을 몰라서 많이 고생하더라고요. 그러면 도움을 줄 수 있는 게 뭘까 고민하다가 기업의 법률 자문을 해줘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그래서 한국에 있는 변호사들의 도움을 받아서 연구원을 설립하고 매주 1회씩 소식지를 만들었어요. 일종의 중국법률 신문이죠. 중국에 진출할 기업들을 위해 무료로 서비스한 거죠. 기업들은 반응이 좋았어요. 소식지를 읽고 자문이오면 간단한 것들은 바로 회신하고 시간이 소요될 경우 전문가를 소개해 주기도 했어요.

  소식지를 매주 만드는 게 간단해 보이지만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에요. 기삿거리를 찾고 조교에게 번역 일을 나누고 번역한 것을 교정해서 우리 스타일대로 바꾸는 힘들고 복잡한 일이죠. 그래도 대학 시절에 신문 만드는 경험이 도움이 됐어요. 제게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하지 못한 경험이 제 인생의 중요한 연결점이 되더라고요. 결국, 인생의 모든 경험은 다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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