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와 불의가 싸우면 정의가 이길 것 같지만 실제로는 불의가 거의 매번 이긴다. 불의가 아흔아홉 번쯤 이기면 정의는 멋쩍은 듯 한 번 정도 이긴다. 이처럼 정의는 무력하다. 정의에는 목숨까지 내놓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택하기는 쉽지가 않다. 거기에 돌아오는 이익마저 별로 없으니 당장 눈앞에 콩고물이라도 떨어지는 불의를 택하기 쉽다. 사람은 습관의 동물이라 불의도 자주 저지르면 양심이 마비되어 불의하다는 인식조차 없는 확신범이 되기도 한다.

  2016년, 세상에는 의자가 부족하다. 의자가 절대 부족하니 앉지 못하고 쉬지 못한다. 그러니 앉을 곳을 찾아 유령처럼 어둠을 헤매기도 한다. 의자가 부족해도 세상이 정의로우면 번갈아 앉는 지혜로운 배려가 작동하지만 불의하면 설령 의자가 남아도 한 사람이 서너 개의 의자를 독차지하는 불평등구조가 생성된다.

  하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의자에만 관심이 있을 뿐 타인의 의자에는 관심이 없다 보니 “없는 의자를 찾아 헤매는 유령”들이 되고 만다. 지금 2016년 대한민국이 그 지경이다. 일자리를 구하는 청년들은 넘쳐나는데, 기업들은 일자리를 창출하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중소기업에는 일자리가 넘쳐나는데, 청년들은 스스로를 유능하고 귀한 존재로 자처하며 대기업에만 관심을 기울일 뿐이다. 어쩌다 원하는 기업에 취업하더라도 정규직은 하늘의 별따기이고, 모두가 비정규직으로 내몰려 몇 년 주기로 새로 비정규 신입사원 되기를 반복한다. 모두가 불안하다.

  의자가 부족한 세상에서 유령을 양산하지 않으려면 국가가 의자를 많이 제공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일자리 창출의 90% 가까이를 차지하는 중소기업에 대한 정부의 지원은 열악하고, 불과 10% 남짓의 고용창출능력밖에 없는 대기업에 대한 정부의 지원은 파격적이다. 금융, 세제면에서 특혜가 넘쳐난다. 대기업 곳간에는 황금이 쌓이는데, 신규 일자리는 창출되지 않는다.

  7, 80년대 청년들이 정치민주화를 외쳤듯, 2010년대에는 경제민주화를 외칠 때가 되었다. 그런데 의자를 뺏기면서도 연대와 단결하지 않는다. 청년들은 계속 유령으로 살 것인지, 아니면 사람으로 살 것인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정의를 부르짖지 않는 자에게 떠먹여 주는 이는 아무도 없다. 기억하라, 정의는 단 한 번 이긴다. 그것으로 족한 것이 정의이니 겁내지 말고, 정의를 외치라. 뭉치는 것, 그것은 청년의 특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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