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을 공부하는 사람에게 헤겔, 야스퍼스, 하이데거는 반드시 넘어야 하는 큰 산이다. 비단 철학뿐 아니라 문학과 역사학, 그리고 거의 모든 사회과학에서 이들의 말과 사상은 인용(引用)된다.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거나 연구 활동에 몰입했던 이 철학자들은 휴식이 필요할 때마다 산책을 다녔다. 사람들은 위대한 철학자들이 걸었던 길을 ‘철학자의 길(Philosophenweg)’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하이델베르크(Heidelberg)’라는 발음 자체만으로도 뭔가 ‘독일스러움’이 느껴지는 이 대학 도시에 온 가장 큰 이유는 철학자들이 거닐었던 길을 몸소 걸어보기 위해서였다. 이 길을 걸으면 내 머릿속으로 위대한 사상가들의 생각이 순식간에 다운로드 될 것 같은 즐거운 상상을 하면서. 

 

  독일은 어디를 가도 ‘검소’라는 말이 떠오르지만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교가 있어서 그런지 이 도시를 걷고 있는 사람들의 옷차림은 더욱 더 검소하게 보인다. 도시 인구 15만 명 중 약 3만 명이 대학생이라고 하니 왜 그렇게 보이는지 이해가 된다.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의 건물 자체가 6백 년 이상 된 것들이 많아서 하나하나가 대부분 문화재급인데, 최신식 기자재를 자랑하는 한국의 대학 캠퍼스에서는 볼 수 없는 깊이가 느껴졌다. 한국에서는 비싼 등록금을 내가며 자신만의 영달(榮達)을 위해 공부하는데 비해, 독일에서는 등록금은 아예 없고 학생들이 공부하는 자체가 사회 발전에 기여하는 노동이라고 여겨진다. 이것이 내가 느끼는 대학의 깊이인 것일까. 공부를 하고 못하는 것이 빈부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되는 나라와 빈부와는 상관없이 공부하는 자체가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숭고한 노동 행위라고 여기는 나라는 큰 차이를 만들어 낼 수밖에 없다. 
 
  대학생들이 많다보니 물가도 다른 도시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렴하지만 호텔에 묵지 않고 하이델베르크 고성(Heidelberger Schloss) 주변에 있는 8인실 유스호스텔에서 여행의 첫 번째 날을 보내기로 했다. 안락한 호텔보다는 많은 국가에서 온 여행객들과 만나는 것이 왠지 더 ‘철학적 행동’ 같다. 이미 방 안에는 자메이카, 미국, 네덜란드, 일본에서 온 친구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지만 모두 이 도시를 찬미하고 존중하는 발언을 한다는 것이었다. 하이델베르크는 스스로 결코 자랑하지 않는다. ‘I SEOUL YOU’ 같은 기괴한 말도 늘어놓지 않는다.  
 
  고성 위에서 보는 넥케어(Necker)강 건너편에 위치한 철학자의 길은 정말 사색을 위한 경로처럼 그럴듯하게 보인다. 철학자들의 발자국 소리가 강의 물줄기를 타고 올라와 고성 위로 퍼지는 동화 같은 상상을 해 본다. 대학 교육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을 가진 사람과 왜 독일에 유독 위대한 철학자가 많은지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에게 하이델베르크 여행을 권한다. 화창한 날 운이 좋으면 철학자의 모습을 한 구름 한 점이 만들어져 그림자를 드리울 지도 모르겠다. 하이델베르크에서 고민하고 사색했던 수많은 학자들이 한국의 현재를 본다면 무슨 말을 할지 몹시 궁금해지는 첫눈 오는 2016년 11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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