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잘 쓰지 않는 옛말 중 파락호(破落戶)라는 표현이 있다. 파락호란 음운한자 깨뜨릴 파(破), 떨어질 락(落), 집 호(戶)로 구성한 말로, 대략적인 뜻을 풀이해보면 ‘집(재산)을 모조리 날려버림’ 정도가 되겠다. 파락호는 ‘권력과 재력이 있는 집안의 자손이지만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을 허투루 쓰며 탕진하는 난봉꾼’ 혹은 ‘가문을 몰락의 위기로 몰아가는 인물’ 을 지칭하는 말이다. 한자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가 보면 절제되고 점잖아 보이는 말이지만 사실은 욕설과 조롱, 비아냥거림에 가까운 말이다. 세간에서 자기 이름 앞에 파락호가 붙여져 불린다는 것은 불명예이자 수치로 소위 ‘인간 말종’이라 불리는 것과 다름없다. 보통 자기가 살아가는 사회에서의 평판이나 주위의 눈초리 때문에라도 파락호라는 말을 들을 일을 자제하는 것이 우리네 인간이다. 헌데 우리 근현대사에는 나라의 앞날을 위해 파락호라 불리길 마다하지 않았던 인물이 있었다. 

 

 김용환은 일제 강점기에 안동 일대에서 파락호하면 누구나 그의 이름을 떠올릴 정도로 악명 높았던 사람이다. 그는 명문가 의성 김씨 학봉종가의 장손이자, 퇴계 이황의 대제자인 학봉 김성일의 13대손이기도 하며, 독립운동가로 의병활동을 한 서산 김흥락의 손자이기도 하다. 앞에 열거한 내용만 봐도 김용환이 단순히 재물만 많은 집안이 아니라 대대로 명예를 지켜 사람들의 존경을 받아온 명문가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가문의 명예를 세상 그 무엇보다 중시하도록 어려서부터 교육받았을 김용환이 ‘파락호’가 되기로 계획한 것은 의병활동에서 얻은 실패의 경험 때문이었다. 김용환은 의병부대의 일원으로 참가하기도 하고, 독립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한 단체 의용단의 서기로도 활약하는 등 의병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었다. 그러나 군자금을 대줄 것을 요청할만한 부호들이 친일 내지는 같은 민족을 착취하는 이들이 많았던지라 그리 큰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일련의 경험은 김용환에게 자신이 가진 재산을 활용하여 군자금을 대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는 확신을 주게 되었다. 그러나 김용환의 가문은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는 명문가인 탓에 군자금을 보낸다는 것이 발각될 경우 일제가 가문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었다. 그래서 김용환은 ‘파락호’로서의 삶을 가장하기로 한다. 그가 선택한 방법이란 오늘날의 가치로 치면 200여억원에 가까운 가문의 재산을 도박으로 탕진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었다. 가문의 재산이 줄어드는 것에 대해 의심을 받지 않을만한 변명거리가 될 수 있을 것이고, 가문의 중심축 역할을 하는 종가가 경제적 어려움으로 곤란에 처하는 것을 문중 사람들이 가만 지켜보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심산이었을 것이다. 그의 예상대로 일제는 김용환이 도박판에서 재산을 잃는다고만 알았고, 문중 사람들은 김용환을 원망하면서도 그가 팔아치운 땅을 다시 되사주기를 반복하여 김용환의 의도대로 집안의 재산이 독립 군자금으로 보내질 수 있었다. 광복 이후 자신과 가문의 명예를 되찾는 것은 물론 독립운동가로서 존경받을 수 있는 기회가 많았지만, 김용환은 죽을 때까지 자기가 독립 군자금을 댔다는 사실을 세상에 밝히지 않았다. 1946년, 임종 직전의 김용환에게 그가 은밀히 군자금을 대왔다는 사실을 아는 독립군 동지가 진실을 밝혀도 되지 않겠냐고 권하자 김용환은 선비로서 응당 해야 할 일을 했을 뿐 알릴 필요가 없다고 답했다고 한다. 파락호라 경멸받고, 외동딸의 혼수자금마저 도박판에서 날린 척 군자금으로 보내 외동딸에게마저 원망 받았지만, 사실은 독립을 위해 모든 걸 내놓은 큰 인물이었던 김용환. 1995년에 와서야 김용환의 외동딸에게 아버지의 공로에 대한 감사로 건국훈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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