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백연(三栢淵) 원안풍(願安風)은 노적봉 밑에 님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님 그려 우는 바람 목포의 노래. 국민가수로 추앙받는 고(故) 이난영 선생의 <목포의 눈물>의 가사 중 일부다. 원래 ‘삼백연 원안풍’이라는 부분은 ‘삼백 년 원한 품은’이라는 가사로 만들어졌는데, 일제가 1933년 선포한 ‘공연과 흥행에 관한 취체령(取締令)’을 통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바뀌었다고 한다. 일제의 식민지배 방식은 가끔 소름을 돋게 만들 때가 있다. 유달산의 노적봉은 이순신 장군이 왜군의 장기간 포위 작전에 대응하기 위해 군량미처럼 보이게 할 의도로 짚으로 위장하여 적군의 사기를 떨어뜨렸던 곳이 아니던가. 노적봉은 단순한 산위의 바위가 아니라 제갈량도 울고 갈 전쟁 전술의 현장이었다. <목포의 눈물>은 삶의 애환을 위로했고 은유적인 표현으로 일제에 항거했다. 마음으로는 백 번도 넘게 갔던 목포로 목포가 고향인 존경하는 의사 선생님과 함께 의미심장한 기분으로 떠났다. 일기예보에 비 소식이 있었지만 비는 오히려 호남선의 정취를 높일 것이라는 객기(客氣)도 한몫했다. 

  1916년 목포에서 출생한 이난영은 현대대중가요사 분야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꼭 짚고 넘어가야 할 큰 주제다. 그녀의 남편은 천재 작곡가 김해송이었고 딸들은 1959년 아시아 최초로 미국으로 진출한 걸그룹이자 한류의 원조(元祖)라 불리는 ‘김시스터즈’였다. 유튜브로 감상하는 그들의 흑백 동영상은 지금도 대단한 것이었지만, 콧등이 시큰해지면서 눈물이 날 것 같은 이유는 무엇인지. 1967년 김시스터즈가 벌어들이는 돈은 주급으로 15,000불이었는데 그 당시 미국의 연간 평균국민소득이 2500불 수준인 것을 감안하면 선뜻 계산이 되지 않는다. 최고의 연예인들만 초대받았던 에드 설리반 쇼(Ed Sullivan Show)에 22번이나 출연한 것은 비틀즈도 해내지 못한 기록이었다고 한다. 여러 가지 사료(史料)을 미리 읽고 방문한 그녀의 생가와 기념공원인지라 쉽게 다른 곳으로 발길을 돌릴 수가 없었다. 잘츠부르크에 있는 모차르트의 생가 앞에서는 사진 한 장을 남겼지만 목포의 이곳에서는 오랫동안 비석에 새겨진 노랫말을 읊조리며 서있었다. 
 
  한국 음식은 전라도로 통한다. 목포도 역시 이 말이 진리에 가깝다는 나의 확신을 더욱 굳건하게 만들었다. 목포항의 민어회, 택시를 타고 일부러 찾아가서 먹었던 갈치조림과 연포탕, 그리고 긴 줄을 서야만 ‘쟁취’할 수 있는 콜롬방 제과의 빵. 빵을 사려는 줄은 아직 길기만한데 빵이 스무 개밖에 남지 않았다는 판매원의 목소리에 잠시 긴장했었던 난 빵을 이야기하며 쟁취라는 말을 쓰고 있다. 길을 물으면 친절하게 안내해주는 사람들의 진한 목포 사투리는 목포의 맛과 함께 긴 여운을 남긴다. 
적지 않은 비가 내렸던 8월 말의 목포에서 우산도 쓰지 않고 유달산에 올랐던 이유는 더 이상 삼백연 원한풍이 아닌 ‘삼백 년 원한 품은’이라는 원작 가사로 부르는 위대한 가수의 노랫소리가 산 정상을 휘감고 있음을 느끼고 싶어서였다. 내 호남여행의 시작은 목포에서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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