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 프롬은 삶의 태도를 “소유 양식”과 “존재 양식” 둘로 구분했다. 무언가를 소유하고 나를 위해 그것을 이용하려는 태도 혹은 대상 자체의 가치를 음미하고 향유하는 태도다. 산책길 아름답게 핀 꽃의 존재 자체에 감탄하고 그 아름다움과 향기로움을 음미하는 태도와 그 꽃을 꺾어 나의 소유로 만들려 하는 태도 사이의 차이다. 물론 이는 그보다 앞서 인간의 삶을 관계성으로 규정하고, 그 관계 맺음을 “나-그것”(Ich-Es)의 방식과 “나-너”(Ich-Du)로 구분했던 철학자 마르틴부버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나는 타인을 하나의 대상으로 삼아 접근하는 관계 맺음의 방식이라면, 다른 하나는 타인의 존재를 존중하고 그를 향해 나를 열고 다가가는 태도다. 말하는 방식은 살짝 다르지만, 사실은 같은 이야기들이다.

  요는 소유 방식을 버리고 존재 방식을 택하라는 것이 아니다. 어느 하나만으로 살 수는 없다. 소유의 양식이 필요할 때가 있다면, 존재 방식이 어울릴 때도 있다. 문제는 이 둘의 경계를 지우는 것이다. “너”가 될 수 없는 대상을 “너”로 만드는 돈키호테식 우상숭배, 혹은 내가 중심이고, 주변의 모든 것이 나를 위한 “그것”이 되는 겨울왕국. 이것이 우리 삶의 비극이다. 물론 우상숭배는 가짜 숭배다. 애초에 경배를 이끌어 낼 “너”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극의 원인은 대부분 “너”의 과잉이 아니라, 그 반대다. 내 욕망을 위해 “너”여야할 존재가 “그것”으로 만드는 폭력이다. 최근 터져나오는 “Me, too!”의 목소리 역시 내 욕망의 배출구로 내 이웃을 대상화하는 폭력에 대한 항거다.

  이 폭력은 자해(自害)이기도 하다. 비극의 본질은 내 욕망을 위해 “그것”으로 만든 “너”가 실은 나 자신의 삶이었다는 사실이다. 내 삶 자체가 관계임을 잊은 채, 첩첩이 쌓여 내 삶을 이루는 그 관계의 속살을 양파 “껍질”로 만드는 어리석음이다. 친구를 이용하면 친구를 잃고, 친구와 함께 내 삶의 살 점 하나가 떨어져 나간다. 그래서 어느 시인은 마을의 조종이 누구의 죽음을 기리는 것인지 묻지 말라고 충고한다. 내 이웃의 죽음은 또한 나의 일부, 곧 나 자신의 죽음이기도 하니까.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성경의 가르침 역시 내 몸만으로는 내 삶이 존재할 리 없다는 진리의 표현이다.

  사월은 아직도 아프다. 욕망의 전횡 앞에 생명이 얼마나 무가치할 수 있는지 일깨워 준 세월호의 충격은 생생한 탓이다. 또한 지금도 여러 모양으로 재현되는 우리 삶의 “세월호”들 때문이다. 이 아픔을 추스르며, 더 나은 삶을 생각하는 숭실의 사월이 되었으면 좋겠다. “사랑과 섬김”이라는 숭실의 교훈이 그저 하나의 명분이 아닌, 더없이 절박한 생존의 외침임을 깨우치는 사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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