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의 언어와 사과의 품격
사과의 언어와 사과의 품격
  • 김영일 초빙교수(국어국문학과)
  • 승인 2018.05.28 13:22
  • 호수 12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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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실수로 누군가의 기분을 망치거나 일을 그르치기도 하고, 잘못된 말과 행동으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사과란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행위이므로 사과하는 사람에게도 큰 용기가 필요하다. 사과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진정성이다. 진정성 있는 사과는 상대방의 용서를 이끌어내고 관계 회복을 도우며 분위기를 반전시키지만, 진정성 없는 사과는 상대방의 분노를 돋우고 상처를 깊어지게 하며 여론을 악화시킬 뿐이다.


  TV에서 기업인이나 연예인의 공개 사과를 종종 듣게 된다. 그런데 그들의 사과에는 자기의 잘못을 진심으로 인정하고 뉘우치는 책임감 있는 말보다는 해명과 책임 회피의 표현, 형식적이고 상투적인 표현이 더 많아 보인다. 반면, 피해자에 대한 사죄는 거의 없다. 그래서일까? 참회가 담긴 사과라기보다는 군색한 변명에 가까워 보인다. 사과에 포함된 문장 하나하나를 보면서 말 한마디의 가치와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된다.  


  사과문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할 내용은 사과의 주체와 대상, 무엇을 어떻게 잘못했는지 정확하고 구체적인 내용 설명, 잘못의 시인과 반성, 사과하는 이유, 어떻게 책임질 것인지 후속 조치와 재발 방지 대책 등이다. 사과하려면 우선 유감을 표명해야 한다고 설명하는 책과 기사가 있는데 ‘유감’은 마음에 차지 않아 못마땅하고 불만족스러운 느낌을 뜻하는 것이므로 사과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사과할 때는 자기의 입장이나 감정을 설명해서는 안 되며, ‘오해’, ‘억울’ 같은 단어를 사용해서도 안 된다. 


  사례를 통해 보도록 하자. “본의 아니게 상처를 줬다면 사과드립니다.”, “그럴 의도는 없었지만 불편을 끼쳤다면 죄송합니다.”는 진정성과는 거리가 먼 매우 부적절한 사과 표현이다. 사과는 잘못을 시인하고 반성하는 것이 전제된다는 점에서 ‘상처를 줬다면’, ‘불편을 끼쳤다면’은 상대방을 기망하는 조삼모사 같은 말이다. ‘-었다면’은 불확실이나 반사실을 가정하는 조건 표현이므로 ‘내 생각에 나는 그런 일을 한 적이 없는 것 같다’는 뜻이 함축된다. 이는 곧 ‘나는 당신에게 상처를 준 일이 없는 것 같은데 당신이 그렇게 느낀다면 어쩔 수 없이 사과하겠다’, ‘나는 당신에게 불편을 끼친 일이 없는 것 같은데 당신이 그렇게 느낀다면 내키지는 않지만 죄송하다’는 내용이나 다름없다. 또한 ‘본의 아니게’, ‘그럴 의도는 없었지만’은 ‘내가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다’라는 뜻이어서 잘못을 저질러 사과하는 상황에서는 뻔뻔한 변명으로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이른바 물컵 갑질 사건으로 수사를 받고 있는 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는 “심려를 끼쳐드려 진심으로 죄송합니다.”라고 사과했다. ‘심려’는 ‘걱정’과 같은 뜻이다. 즉, 국민에게 걱정을 드려서 죄송하다는 뜻인데, 과연 국민이 조현민 전 전무를 걱정하는 것이었을까? 1급 발암물질인 라돈이 과다 검출된 대진침대도 자사의 홈페이지에 “많은 소비자분들께 심려를 끼쳐드리게 된 점에 대하여 진심으로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라고 사과문을 올렸다. 여기에도 ‘심려를 끼쳐’가 나온다. 소비자들이 대진침대를 걱정하게 만든 점에 대해서 죄송하다고? 소비자와 국민 모두 대진침대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므로 ‘심려를 끼쳐’는 부적절하다.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도 “국민 여러분 및 대한항공의 임직원분들께 심려를 끼쳐드려서 대단히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라고 사과했다. 우리는 대한항공이라는 회사를 전혀 걱정하지 않으므로 ‘심려를 끼쳐드려서’는 부적절하다. 사과문에는 ‘진심’이라는 단어가 유독 많이 사용된다. 과연 이 단어의 무게와 책임을 제대로 거느릴 수 있는 사과문인지 의문스러우며, 무엇보다도 피해를 입은 당사자들이 제대로 언급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사과문의 진정성과 사과하는 사람의 품격이 의심스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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