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원하면 행복을 잊어라
행복을 원하면 행복을 잊어라
  • 김선욱 교수(철학과)
  • 승인 2018.10.10 10:36
  • 호수 12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첫 번째 썰

 

  누구나 행복하기를 원한다. 그런데 행복을 좇아가다가는 반드시 행복을 놓치게 된다. 이를 행복의 역설이라 부른다. 이 상황을 두고 내가 선승(禪僧)이라면 “행복을 원하면 행복을 죽여라”라고 말할 것이다. “부처가 되려면 부처를 죽여라”라는 선문답을 흉내 낸 말이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대답은 다양하겠지만, 어떤 결론이든 그것은 내게 행복함을 안겨주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행복을 ‘행복감’과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한다. 만일 행복이 행복감과 같은 것이라면 나는 내게 가장 직접적이고 강렬하게 행복감을 줄 수 있는 최고의 물질 즉, 마약을 즐길 것이다. 다른 대안은 술이나 성적 탐닉일 수도 있다. 내 몸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며 행복감을 만들어 내니까. 물론 그 효과는 짧다. 그걸 지속적으로 즐긴다면 그 결과는 파멸이다. 가장 강렬한 행복감의 추구는 가장 강력한 파멸로 이어진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욕망에 주의하라고 했고, 돈과 권력과 성적 탐닉을 경계하라고 했다. 사실 옛날 꼰대들은 ‘성적 탐닉’이란 말을 쓰지 않았고 ‘여자를 조심하라’고 했다. 남성중심의 사회여서 그랬다. 현대적 꼰대인 나는 ‘성적 탐닉을 주의하라’고 말한다. 남자만의 문제가 아니니까.

  행복감이란 감정 상태를 말한다. 우리가 행복감에 초점을 맞추면 즉시 역설에 빠진다. 그래서 행복감이 아닌, 행복을 가져다주는 일에 초점을 맞추는 게 지혜로운 일이다. 감정은 부수적 현상이다. 행복감은 의미 있는 일에 선물로 수반되는 감정 상태이다. 아빠가 아이에게 줄 선물을 들고 집에 돌아왔는데, 아빠보다는 선물을 더 반기는 아이를 생각해 보자. 아이들이야 그런 존재이지만, 대학생이라면 아이와 같은 미성숙 상태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술, 성적 쾌락, 마약 등 직접적 쾌락을 주는 것들이 제공하는 행복은 짧고 얕다. 뒤끝은 더럽고 후회도 크다. 행복과는 좀 더 멀어 보이는 일들, 예컨대 봉사나 헌신, 미래에 대한 투자 등은 행복감보다는 고통을 더 주는 것 같아도 그 행복은 더 깊고 길다. 고상하기도 하다. 이런 행복을 과거에는 ‘지복(至福, felicity)’이라 불렀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수단-목적 관계에 있다. 그런데 단지 이런 이중적 관계만 작용한다고 보는 것은 짧은 생각이다. 좀 더 깊게 생각해 보면 우리의 노력(수단)으로 얻는 결과(목표)는 좀 더 큰 무엇에 의해 좌우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수단-목표-목적 관계라는 삼중적 관계로 자신의 삶을 분석해 보는 게 더 적절하다. 내가 이루려는 목표, 내가 지금 추구하는 일들이 어떤 궁극적 목적에 의해 관리되고 통제되고 있는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나의 현실적 목표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궁극 관심(the ultimate concern)’이 무엇인지 읽어내야 한다.
 
  우리는 현실을 몸으로 살아가면서 맛난 것과 좋은 것을 추구한다. 멋진 연애도 하고 돈도 많이 벌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술도 마시고 성적 기쁨도 누린다(그래도 마약은 해서는 안 된다). 권력도 추구하고 돈에 대한 관심도 크다. 그게 우리다. 이런 모든 것 자체가 나쁘거나 무익한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바라며 살아간다. 그런데 그것이 나의 궁극 목적은 아니다. 그런 것들이 더 큰 무엇을 향하도록 해야 한다. 그 모든 것들이 공동체 속에서 자아의 아름다운 실현, 이웃 사랑, 영원한 가치에 대한 헌신 등과 같은 것이 될 수 있도록 자신의 현재의 추구를 스스로 조정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짜 행복한 삶이 될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