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말에 온도가 있다면 몇 도일까? 말과 글에도 나름의 따스함과 차가움이 있다고 하는 작가 이기주의『 언어의 온도』라는 책을 보면서 과연 나는 학생들에게, 동료 선후배 교수들에게 어떤 온도의 말로 대화를 하고 있을까 궁금한 때가 있었다. 허공을 주시하는 짧은 침묵의 공간인 엘리베이터에 무의식적으로 들리는 학생들의 몇마디에도 온도를 느끼곤 한다. 교수님의 습관이나 과제물을 평하는 재잘거림이나 교수님의 인자함을 전하는 속삭임이 귓가에 맴돌 때면, 나와 연관된 것이 아님에도 이맛살이 찌푸려지거나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하는 순간이 있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속담처럼 말은 주고받는 것이다. 그리고 말은 자신이 주는 것만큼 되받는다고 한다. 이를 종종 잊어버리고 말할 때가 있다. 정작 대화라곤 하지만 자신의 생각을 뇌까리듯 쏟아 내거나, 상대를 생각지 않고 들어주기를 바라는 일방적 태도는 대화가 아니라 소통을 망치는 배설에 불과하다. 대화가 함께 하지 못하고 혼자 하게 되면 차가운 냉기 어린 것이 되고 만다. 

  인간들이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누군가와 ‘함께하기’를 하고, 이를 위해 늘 대화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대화에도 기술이 필요하다. 상대에게 따뜻함을 전하는 대화법의 기술을 배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남을 의식하는 삶 속에서 대화의 기술을 잘 발휘한다는 것은 온기 있는 소통을 한다는 것이다. 따스한 말은 상대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따뜻한 인격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말은 생각을 담고 있는 그릇이다. 야비하고 거친 말보다 정감 어린 말을 통해 품격 있는 인간미를 본다면 훈훈해진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말을 ‘존재의 집’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대화는 쓸모없는 에너지의 소모이다. 이왕 내뱉는 말이라도 따뜻하게 한다면 상대의 귀에 온기를 느끼게 하고 얼굴을 붉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상대의 입장을 헤아리고 상대를 행복하게 하는 말이야 말로 바로 온기를 가진 대화법이다. ‘불통 본부’, 소통하지 못한다는 학교 측에 대한 불만표시를 학생회관 전면에 현수막으로 걸쳐진 것을 얼마 전 보았다. 본부와 학생들 간의 대화에 따스함이 없었던 듯하다. 그러나 그 현수막도 따스하게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다. 같은 말도 다르게! 보다 따스한 말로 캠퍼스를 훈훈하게 했으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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