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극인이란 웃음을 주는 사람들이다. 이는 간단하고 명료하다. 하지만 희극인들의 역할과 모습이 명료하다고 해서 희극인들이 사람들에게 주는 ‘웃음의 의미’까지 간단한 것은 아니다.

  현재 코미디언이라 불리며 공연과 방송 등에서 활약하고 있는 희극인들은 오랫동안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역할을 하던 이들이다. 옛 우리 사회에는 ‘광대’라는 이름으로, 과거 서양 사회에서는 또 다른 이름으로 불리며 사람들에게 재미와 행복감을 줬다. 강조하고 싶은 점은 그들의 역사가 짧지 않다는 점이다. 그들이 웃음을 주던 일들이 모두 단순한 상술이었다면 희극인이라는 직업이 오래도록 유지될 수 있었을까? 세상의 모든 것은, 특히 그 존재가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그 의미와 효용은 어느 정도 보증된다. 고전 명작이 여전히 비싼 값에 팔리듯이 말이다.

  명백하게도 희극인들이 사회적으로 증명해온 효용은 ‘웃음’이다. 그리고 그 웃음의 의미는 사람들이 웃음 짓는 순간에 머물지 않는다. 그 순간을 넘어서 우울하고 힘들고 지치는 세상 속에서 기쁨을 주는 것이다. 웃음을 통해 우리는 고된 노동, 인간관계 등 우리를 지치게 하는 수많은 것들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다. 혹은 희화화를 통해 잠시나마 그것들은 우리에게 별 것 아닌 것이 된다. 특히 사람들을 우울감 속에서 구해주는 것은 희극인들의 중요한 역할이었다. 이는 찰리 채플린의 존재로 증명되지 않았는가? 그는 사람들을 소외의 방향으로 내모는 것들을 성공적으로 희화화해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었다. 이에 따라 그의 이름은 여전히 위대한 희극인으로 남아있다. 심지어 그가 한 세기 전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말 이다.

  오늘날의 희극인들은 여전히 희극인의 역할을 해내고 있을까? 이에 대해 간단히 부정하는 건 어려울 수도 있겠다. 인터넷 상에선 여러 코미디언의 이름이 다소 긍정적인 방향으로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와 반대의 경우도 적지 않다. 성 소수자를 희화화의 방식으로 직·간접적으로 공격하거나 장애인을 비하하는 등의 사례가 있다. 이는 그간 희극인들이 지켜왔던 희극인들의 사회적 역할에 반하는 행동이다. 이 말은, 즉 사회가 바라지 않는 웃음을 꾸역꾸역 짜내고 있을 뿐 이란 얘기다. 희극인들은 ‘무엇을 위해’, 무엇보다 ‘어떻게’ 웃길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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